매일신문

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36) 소설가 장덕조

장덕조(張德祚.1914~)는 백신애와 더불어 향토가 자랑하는 여류작가로 본격적인 장편역사소설을 썼을 뿐 아니라 '매일신문' '영남일보' 등 지역언론의 초창기에 여기자로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약관도 되기전인 19세(1932년)에 이미 '개벽'(開闢) 여기자로 입사, 그해에 단편'저회'(低徊)를 발표하면서 이태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던 장덕조는 일제수탈이극심하던 3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시작, 8.15 광복과 6.25전란에 종군작가로 참가하는 등불굴의 의지로 다량의 작품을 발표했다.

1914년 10월 경북 경산군 자인면 북사리 속칭 순월마을에서 장재수(張在洙.인동 장씨)의딸로 태어난 장덕조는 다른 애들보다 일찍 한문을 깨치고 남다른 재주를 지녀 천재소녀로불렸다.

1920년 어머니와 함께 대구 진골목으로 이사, 대구여자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26년),이듬해 대구여고보(현 경북여고 전신)에 입학하여 3년간 이 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을 1년앞두고 1929년 3월31일자로 서울 배화여고보로 옮겨 그학교를 졸업(1931년)했다.그해에 바로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1932년 학교를 중퇴하고천도교에서 창간한 월간 종합 잡지 '개벽' 여기자로 입사한다.

당시 '개벽'지는 정신의 개벽과 사회개조를 부르짖고 창간하여 꾸준히 항일사상을고취했으나 1926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고, 1934년에 다시 발간하기 위해준비작업을 할 때였다.

개벽사 여기자로 입사한 장덕조는 그해 '제일선'(第一線)지에 단편 '저회'(低徊)가이태준의 추천을 받으면서 문단에도 데뷔,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1934년 매일신보에 장편 '은하수'를 비롯, 단편 '어떤 여자' '해바라기'등을 발표하면서작가로서 자리를 굳혀갔다.

장덕조의 작품은 대부분 역사소설과 여성적 대중소설. 여성의 삶과 성적 욕구, 그것으로인한 인간 파멸의 비극을 활달한 필치로 그려나간 그녀는 후기에 들어 '광풍'과 같은역사장편소설을 발표한다.

식민지 시대 서울 중앙문단에서 여류작가로 여기자로 맹약하던 장덕조는 해방 이후1950년에 6.25전란을 겪으면서 본격적인 대구 피난시대를 꽃피운다.

1950년 대구로 피난온 장덕조는 영남일보 문화부장에 피임됐고, 51년에는 대구매일신문에'여인상'을, 대구일보에 '논개'를 발표했고, 곧바로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 겸 논설위원에피임된다.

지역신문에 연재된 칼럼 '노노자'는 언론인으로서의 장덕조가 지닌 가치관을 보여주는기지와 철학으로 가득찼다. 이처럼 언론인으로서, 문인으로서 영역을 넓혀나가던 장덕조는1951년 육군종군작가단에 동참한다.

1951년 5월26일 대구 동성로 3가 아담다방에서 조직된 육군종군작가단에는 정비석 박영준방기환 구상 황태웅 이호우 유치환 손소희 등도 참가했다. 이때 대구를 무대로 하면서겪었던 고생담은 훗날 수필에서 대구에 있는 동안 줄곧 군복을 입고 지냈고, 좀더 좋은신문을 만들기위해 노력했다고 술회했다.

"대교가 끝나면 신문사 친구들과 함께 길건너 골목안 대추나무집이란 막걸리집으로 간다.오두막 같은 구옥 뜰에 대추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주모가 나물과 콩자반과 뜨거운 국물에막걸리를 내왔다. 나는 더러 찬밥을 얻어 그 뜨거운 국물에 말아 먹었다"

불과 3, 4년간에 불과한 대구 시절, 장덕조는 대단한 문인정신을 갖추고 정열적으로활동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대단한 패기로 정진했다고 소설가 윤장근씨는 말한다."여성으로서 본격적인 역사소설을 개척했다는 것은 높게 평가받아야한다"고 윤씨는평가한다.

54년도 대구시내 상록수 다방(현재 모모양복점)에서 열렸던 장씨의 '여인3대' 출판기념회일화 한토막. 출판사 사장이 대단한 선심이라도 쓴 양 소설집 출간에 대한 생색을 내자,장덕조는 "구걸하는게 문인이냐, 뭐하는거냐. 그 따위 소리를 왜하느냐"며 자신의출판기념회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버렸다. 곧 이어 대구의 모 의사를 모델로 한 '다정도병이런가'를 선보였다. 종전 이후 장덕조는 수복때 다시 상경, 경북 구미를 배경으로한'벽오동 심은 뜻은'(삼성출판사) 전14권 '이조의 여인들'등 수많은 소설집을 출간했으며미국과 서울을 오가며 서울 압구정동 한양아파트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강언교수(대구대)는 "민족현실이 참담의 극에 다한 30년대에 작품활동을 시작,8.15광복과 6.25전란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다량의 작품을 발표했던 여류작가"라며활발한 재조명작업을 펴고 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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