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윤기의 세상읽기-'백인'의 죽음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以死)라…'

우리에게는 고전이 되어 있는 희한한 제문, '조침문(弔針文)'에 나오는 한구절이다. '희한한 제문'이라고 한 것은, 이 제문이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 아니고 바늘 부러진 것을 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거니, '백인'이라는 것은 사람의 이름이다. 중국 고전을 끌어다 자기 심정을 의탁한 이 글은 그러니까 '내가 백인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백인은 나 때문에 죽었으니(伯仁由我以死),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백인유아이사'라고 하면, 직접적인 책임은 없더라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만큼 그 책임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내 친구 김박사는, 마땅히 보아야 할 응급환자 한 사람을 다른 병원으로 실어보낸 적이 있다. 아내와 몹시 다툰 뒤라서 잔뜩 화가 나 있던 김박사는 그러고도 별로 죄의식을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내 친구 김박사는 며칠 뒤, 그 '다른 병원'에 있는 동창생의 전화를 받고서야 그 환자가 태아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친구 동창생은 이 슬프고도 무서운 소식을 전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네는 그 환자를 보았어야 했다. 자네가 그 환자와 태아를 죽였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자네가 그 환자를 살릴 수도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네가 '백인'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백인'은 자네로 인하여 죽은 것인 만큼 자네는 이 죽음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의사나 성직자가 앉는 자리는 굉장히 무서운 자리다. 의사는 병든 사람의 육체를 언제나 살릴 수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죽일 수는 있다. 성직자는 병든 사람의 정신을 언제나 살릴 수 있는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죽일 수는 있다. 나는 의사와 성직자를 굉장히 존경하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이 인식을 엄숙한 실존적 습관으로 삼지 못하는 의사나 성직자는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미국소도시의 한 개인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던 내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가 끔찍하다.

5천달러나 되는 병원 건물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은행구좌에는 1천달러밖에 없었다. 그날 그 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 환자는 얼김에 자궁적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내 친구가 미국인 원장에게 대들면서 한 말, 원장이 내 친구에게 한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인용해 보겠다."닥터 S, 훠ㅅ 이즈 디 인디케이션 오브 히스터렉터미?(S박사, 어떤 근거에서 저 환자의 자궁을적출한 거예요)"

"쉬 해즈 언 인슈어런스. 해즌트 쉬(보험에 가압해 있잖아)"

원장의 대답은 명쾌했다. 레지던트 근무 기간 끝나고 환송회가 있던 날 밤 친구는 백달러를 1센트 동전으로 바꾸고, 이것을 큰 깡통에다 넣어 S박사에게 건네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바꾸면 동전 1만개가 된다)

"유 라이크 머니, 안츠 유, 닥터 S?(S박사, 당신 돈 좋아하지)"

빵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 회사 제품을 제 자식들에게 먹일 수 있어야 한다. 책 만드는 사람은 자기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제 아내, 제 자식들에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빵, 그렇지못한 책을 만드는 짓은 소비자의 육신을 천천히 죽이는 짓, 독자의 정신을 천천히 죽이는 짓이다.

먹이지 못하고, 읽히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빵공장 사장과 출판사 사장은 지금도 '백인'을 죽이고있다. 농사짓는 분들이, 자기 밭에서 자기 손으로 가꾼 모든 고추와 배추를 손자 손녀들에게 먹일수 있는가? 없다면 그분들은 지금도 '백인'을 죽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백인'을 죽이고 있다.나는 지금 우리 삶의 기초 환경을 '백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기초 환경을 누가 죽였는가? 죽인 사람도 없고 안죽인 사람도 없다. 우리가 과연 이 '백인'의 죽음에서 자유로운가?〈소설가·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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