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여성들은 날 보며 부럽다고들 한다. 평생 풍족하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고 믿으면서….
10년전인 1988년.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로 16년이란 세월동안 외국 생활을 하던중 당시 국제결혼해 살던 미국인 남편으로부터 사업이 어려우니 친정에 한달만 가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 얼마후 나는 다섯살된 아들을 데리고 단돈 1백 달러도 없이 가방만 하나 달랑 들고 한국으로왔다. 물론 친정식구들에게는 휴가차 왔다 하며.
한달, 두달이 가도 남편은 소식이 없었다. 계절은 바뀌었지만 갈아입을 옷도 없던 나는 친정식구눈치보기에 급급했다. 예전같으면 이틀이 멀다하고 국제전화를 하던 사위가 몇 달이 가도록 전화한 통 없으니 친정 부모님의 역정이 서서히 시작됐다.
시집간 딸이 아이와 빈손으로 친정에서 기약없이 있다는 둥, 동생 식구들 보기에 민망스럽다는둥 계속되는 눈치에 나는 더 이상 남편만 기다릴 수 없었다.
드디어 신문을 뒤적이며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직장경험으로 서울의 외국인 회사또는 대사관 등에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국적이 미국이라는 죄(?)로모두가 급여를 낮게 줘도 되는 한국인을 원했다. 또 당시 한국말이 서투른데다 이곳 실정을 잘모르는 내가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단둘이 생활할 자신도 사실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친정에 눌러 있기로 마음먹었으나 10여년전 농촌 풍경속에 공장밖에 보이지 않던구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어느날 문득 예전에 미국 회사일로 한국에왔을 때를 기억하며 외국어 학원쪽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그 당시 외국어 학원은 구미에 단 한곳뿐이었다.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 갔다가 마침 학원장과 마주치게 됐다. 그는 대뜸 외국에서 온 사람이냐고물으며 강의를 맡아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 아니 돈이 필요한 나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완벽한 영어와 그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싱가포르 등에서의 국제적인 사회생활로 다듬어진 나의 경험은 당시 구미에서 화제거리가 됐다.
나의 강의를 듣겠다는 수강생 때문에 의자가 모자라 다른 강의실에서 끌어오고. 나는 갑자기 영어강사로 '히트'를 치게 됐다. 여기저기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다는 대학 강의자리도 들어왔다. 처음에 나는 시골에 있는 대학이라며 건방지게 거절하다가 돌아갈때까지는 안정된 수입이 되겠다는 생각에 허락(?)했다.
88년 2학기부터 나는 대학 강사로 변신했고 생전 저축을 모르며 살아온 나는 갑자기 짠순이가 됐다. 강의료가 들어오면 아이의 태권도·미술학원비만 남기고 전부를 은행에 넣었다. 체면, 자존심다 버리고 나는 친정에서 생활하며 일절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 시작했다.
1년이 넘도록 남편은 단 1달러도 보내지 않았고 부모님은 남편의 마음이 벌써 딴 곳에 있으니 이혼하라고 야단이셨다. 하지만 나는 남편을 의심하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고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내가 열심히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 6시부터 첫 강의를 시작해서 저녁 11시까지 나는 뛰었다. 통장의 돈은 점점 불었다. 통장에 찍히는 금액이 신기하기만 했다. 내 평생 처음그렇게 많은 돈을 저축하게 된 것이었다.
89년 여름, 드디어 남편이 왔다. 한편으로 무척이나 기다리며 사랑했던 남편이었지만 얼굴을 다시본 순간 반가움과 원망사이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혼'이란 말을 해버렸다. 큰 충격을 받은듯 이튿날 남편은 아무말 없이 혼자 떠나버렸다. 가는 남편을 붙들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싸늘한눈총에 나는 한마디 말도 못했다. 남편의 뒷모습을 되새기면서 피아노를 두들기며 마음을 달랬다.꼭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올거라고. 남편이 떠난 바로 그날 오후, 어떤 여성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도착했다. 지난 2년간 남편과 함께 살았으며 다시 돌아올 날을 애타게 기다린다며.이후 나의 친정살이는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부모님은 그렇게 예뻐하시던 외손자의 행동, 말투 모두가 나쁜 사위놈을 꼭 빼닮았다고 미워하셨고 하루빨리 아빠에게 보내라고 극성이셨다. 태어나서 하루도 나와 떨어져 본 적이 없던 아이를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갈수록 외국인은 거의 구경도 할 수 없는 조그만 구미에서 호적도 없는 혼혈아를 학교로 입학시킬 수 있을지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더 나아가서 아이에게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생각이 들었다. 내 욕심보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특히 남자아이가 남자답게 성장하는데는 아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90년 4월 7일, 아이의 일곱번째 생일 이틀전 난 아이에게 아빠와 함께 먼저 가 있으면 엄마는 학교수업이 끝나는 데로 갈 것이라고 말하며 아이를 보냈다. 오래간만에 아빠를 본 아이는 무척 좋아하며 아빠 손을 잡고 훌쩍 떠났다. 아이가 비행기에 올랐을 시간, 나는 벙벙한 느낌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구미로 내려왔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처음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난 별로 모성애가 없나?
그러나 집에 도착해 현관에 항상 있던 아이의 신발, 방안에 흐트러져 있어야 할 장난감, 한쪽 벽에 걸려있던 미술학원 가방 등 아이의 그 모든 것이 싹 없어져 버린 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내렸다. 한동안 나는 부모님 앞에서 귀머거리, 벙어리가 됐다. 학교와 기업체강의는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했지만 저녁에 혼자 있을 때면 항상 내 옆에 있으면서 말동무였던아이 생각으로 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곤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빨리 돈을 모아서내가 아이를 다시 데려오리라고.
그후 나는 진짜 일벌레, 구두쇠가 되어 일하고 돈모으는 것만 했다. 91년초 나의 통장에는 이천만원이라는 거액이 모였다. 그 당시 내가 본 대학에서의 외국어 교육은 정말 조크(Joke)였다. 한반에 백명씩 모아놓고 회화를 가르치니. 그것은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한 형식적인 과정이지 효과적인 회화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이상적인 외국어 학교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생활 3년에 아무런 물정도 모르고 자금, 줄(?)도 전혀 없이 내가할 수 있는 것은 동네 외국어 학원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주말이면 서울의 유명 외국어학원을 둘러보았으나 간곳마다 나는 실망했다. 솔직히 서로 등록하려고 줄을 선다는 말에 더더욱 놀랐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집주변의 건물 하나가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 덜렁 전세 계약을 해버렸다. 집에서 걸어서 왔다갔다 하기 편리하다는 생각만으로. 미국에서 설계사무소 근무경험을 되새기며나는 밤새워 도면을 그리며 내부공사 계획을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무슨일을 하느냐 하시며 조용히 학교에 있다가 좋은 상대가 있으면 재혼이나 하라고 하셨다.하루 평균 7∼9시간 수업하러 여기저기 다니면서 나는 은행, 가구점 등을 찾아가며 내 꿈의 첫단계 실현을 위해 바쁘게 뛰었다. 당시 나에게 있었던 것은 국제 비지니스에 꼭 필요한 외국어를가르치는 대한민국 제일의 외국어 학원을 만들겠다는 집념뿐이었다. 전 재산을 투자하고 은행대출, 후불결제 등의 방법을 총동원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겁없이 시작한 것은 틀림없는사실이다.
드디어 91년 3월 18일 나의 첫 사업장 '최윤희 외국어학원'이 탄생했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대부분 친정부모님의 손님을 초대해 개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친정 부모님이 학원을 차려준 걸로오해했지만 당시 부모님으로부터는 단돈 일 원도 받지 않았다.
학원을 시작한 후 나는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만류하신 이유를 조금씩 깨닫게 됐다. 우선 외국생활중 형성된 나의 서양식 사고는 수시로 한국적인 관습과 부딪쳤다. 떡값, 봉투, 인사라는 단어의'참뜻'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법대로 하겠다는 고집은 영문도 모르는 기습적인 감사, 조사에 맞부딪혔다. 모 기관에서는 아예 나와는 대화가 안된다며 남자를 보내라는 말까지 했다.수차례 학원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며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당시 외국인은 학원설립 불가라는 규정 때문에 나는 이미 미국 국적을 포기해버린 상태였다. 솔직히 그렇게 힘들게 모은 나의 전 재산을 쉽게 버릴 수는 더더욱 없었다. 결국 나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믿음 하나만으로 꿋꿋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학원을 시작한 후 처음 2년간은 하루 약 10시간씩 직접 강의하며 인건비 지출을 줄였다. 만 2년이 지나서부터 조금씩 나의 인건비 몫이 남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 피곤했지만 강의시간만큼은즐거웠고 또 돈이 다시 모이자 신바람이 났다. 한 개층으로 시작했던 학원이 두 개층, 95년에는세 개층으로 확장됐다. 해가 지날수록 주위의 많은 기업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나역시 몇 년간처음에는 말도 잘 이해 못하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물론 요즘도 가끔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지만. 학원이 커갈수록 외국어 대학 설립의 꿈은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작년말 IMF직전, 공단한복판에 기업체 종사자 전용 학원을 하나 더 세우기로 결심했다. 계약과 동시에 IMF가 터졌고공사중 주위에서 많이 염려를 했으나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98년 2월 새학원을 오픈할 즈음 공단의 불황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많은 업체가 부도나고문을 닫았으며 주변의 많은 직장인들은 일자리를 잃게 됐다. 물론 우리 학원역시 불황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업체는 꽁꽁 얼어붙은 자금사정속에서 제일 먼저 교육경비에 칼을 댔고교육생 수는 매월 급격히 떨어졌다.
어느덧 내가 한국에 온지도 만 10년이 지났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보냈던 아들도 이젠 십대 청소년이 됐다. 지난 4월 봄방학때 약 3년만에 엄마를 찾아왔다. 1백80cm에 가까운 키,앳된 아기목소리가 아닌 굵고 낮은 목소리와 콧수염. 더 이상 내 머리 속의 귀여운 꼬마가 아니었다.
내가 낳고 젖먹여 키운, 하나뿐인 나의 핏줄이지만 아이의 사고와 세계는 이제 나의 것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꼭 일주일을 나와 함께 보내고 떠났지만 아이를 보낸 후 나의 마음은 한동안혼란스러웠다. 우선 내가 낳은 하나뿐인 자식이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죄책감이 날 무척이나 괴롭혔다. 이제 다시는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더욱 깊은 슬픔에빠뜨렸다. 경기불황이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했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내가 누군가. 70년대 초 10대 소녀로 홀로 미국에 건너가서 인종차별, 언어·문화의 장벽을 힘겹게 넘었다. 20대엔 결혼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피부가 흰 사람보다 더 잘 한다는 신임을 얻어유럽과 동남아까지 파견근무를 나가는 황홀한 순간도 경험했다. 그리고 여러 민족의 언어와 풍습속에서 얼굴은 동양인, 하지만 미국인으로 지내며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다. 30대에 들어서서는 여자로 태어나 안정된 생활을 시작할 무렵, 정성을 다해 키워온 아이마저 내 품에서 떠나 보냈다.그후 생소한 환경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오늘날 이렇게 40대로 접어들었건만. 그래 난 할수 있어,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설거야!
나는 다시 강의에 직접 뛰어들며 우리 학원 식구들에게 이 어려움을 꼭 이겨나갈 것이라고 외쳤다. 우리도 구조조정, 감봉을 했다. 여름동안 밤과 낮, 주말 구분없이 열심히 노력한 덕분인지 9월초 우리 학원이 경상남·북도, 대구광역시에서 사설학원으로는 유일하게 교육부장관 외국어부문학점인정 기관으로 승인을 받았다. 외국어 대학의 문이 서서히 열린 것이다.
오늘도 난 아침 5시10분이면 일어나 6시30분이면 집을 나선다. 95년 봄 우연히 만나 결혼한 지금의 남편은 묵묵히 나의 기둥이 되어준다. 이미 다 성장한 청년이지만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남편의 두 아들에게는 떠나보낸 아들에게 못다한 사랑을 주면서 나는 모든 이에게 외치고 싶다. 지금의 어려움은 A PIECE OF CAKE(누워서 떡먹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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