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금강산관광 4박5일 본사기자 취재기

동해항을 떠난 '현대금강호'가 장전항에 도착한 것은 19일 오전 6시. 7시10분경 "유람선에서는 장전항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이나 녹화촬영을 할 수 없다"는 북측도선사의 목소리가 선내방송을 통해 흘러나오자 드디어 북한땅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새벽어둠이 걷히면서 바라본 장전항 뒤편으로는 외금강의 한자락인 '별금강'이 펼쳐져 있었다.북한땅을 밟은 것은 오전 10시10분. 금강호를 바로 선착장에 댈 수가 없어 바지선에 옮겨 타는데시간이 적지 않게 지체됐기 때문이었다. 선착장에는 '금강산관광객을 동포의 심정으로 환영한다'는 대형 환영구호가 걸려 있었고 대형스피커 4대를 설치한 북측의 차량이 민요를 틀어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북한식의 환영행사인 셈이다.

곧 바로 새로 지은 출입국관리소로 들어갔다. 김일성배지를 단 북측직원들의 표정이나 관광객 모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입국수속은 예상외로 간단하게 끝났고 검색도 까다롭지 않았다. 인사말을 건네면 '좋은 구경하고 오십시오'하고 받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온정리를 거쳐 첫날 일정인 구룡폭포로 가는 길은 북측이 시멘트로 포장해 새로 만든 길이었다. 길 양쪽으로는 철조망이 둘러쳐치고 5백m마다 군인들이 도열해있어 다소 살벌한 분위기였다. 주민접촉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온정리로 접어들면서 농가와 논에서 일하는 주민들이 보이는 등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모습이 나타났다. 북한땅에 사는 사람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도 그들은 일하다 말고 우리를 쳐다보다 함께 손을 흔들어 주면서 따뜻하게 환영했다.

조선일보와 KBS기자 및 통일부직원 등 20여명이 북측의 상륙거부로 내리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구호는 이들의 생활이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초입에서 보이는 닭알바위 등 우람하고 잘생긴 바위마다 '주체'니 '김일성동지만세'등의 구호가 새겨져 있었다.

구룡폭포가는 길은 미인송이 즐비한 창터솔밭을 지나 '신계사터'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졌고 산행은 '오선암'에서부터 시작됐다.

눈앞에 펼쳐진 금강산의 절경에 관광객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오자 동행한 유홍준교수(영남대)가"금강산에서는 감탄사와 필름을 아껴야 된다"며 본편을 예고한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이 바로 이곳이로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옥류동과 앙지대를 지나게 되면서부터다.

앙지대에서는 유일하게 정치적 구호가 아닌 '지원(志遠)'-김형직선생탄생 60돌기념-이라고 새긴한자어를 만나 이색적이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선생이 뜻을 멀리 가지라고 가르쳤다는 것을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산행에 나선지 1시간정도가 지났을까. 비봉폭포에 다다르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고 현대측 안내원들이 갈 길을 재촉했다.

신라때의 사선 영랑과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 하루쯤 다니러 왔다가 사흘을 놀다갔다고 하는 삼일포와 해금강은 다음날 찾았다. 해금강은 그러나 군사지역에 위치해 바다쪽에서는 보지 못하고총석정도 가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만물상은 '역시 금강산이구나' 하는 탄성을 참지 못하게 했다. 만물상으로 향하는 온정령고갯길은1백구비나 돼 관광버스들이 꼬리를 물고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삼선암을 지나 절부암에 다다르면 만물상의 전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어 하늘문을 지나 천선대에 오르는 길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로 착각할 정도였다.

사흘간의 북한땅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출입국 심사대를 빠져 나오는데 낯이 익어버린 북측직원이 '또 오십시오'하고 말을 건넨다.

21일 저녁 관광증 반납문제로 출항시간이 2시간정도 지연되었지만 갑판위에서 '어머니 이제 갑니다…' 하고 목놓아 부르는 실향민들의 아쉬움을 북한땅에 남겨두고 금강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광버스에서는 우리 방송이 잡혔다. 21일 북한땅에서 북측간첩선이 침투했다는 보도를 들었지만현대측은 '간첩선은 간첩선이고 금강산은 금강산' 이라고 말했지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금강산관광길이 겨우 열린 남북관계의 한 단면이었다.

〈徐明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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