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심연 꿰뚫는 詩人 송재학과 엄원태는 1955년생 동갑내기다. 한사람은 치과대학을 나온 의사이고 또 다른 한사람은대학에서 조경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시를 쓰는 시인이고 '오늘의 시'동인으로함께 활동했다. 친구이자 동지다.
사마천의 사기 '손빈과 방연'편에는 친구관계를 빗대어 인간관계의 지난함을 화두로 제시하고 있을만큼 '우정'은 가깝고도 어려운 관계이다.
송재학은 90년대 한국시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의 한사람이다. 엄원태의 시집 '소읍에 대한 보고'(1995)는 근래 몇년간 내가 읽은 가장 뛰어난 시집이다.
현란한 수사, 미확정적인 이미지, 내면의 기록으로 위장한 과대한 포즈등이 난무하는 오늘날 시단일각의 가벼움 속에서 이 시집만큼 삶의 심연을 꿰뚫어보고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집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런 엄원태 시의 배후에는 그를 자주 소멸과 허무의 늪으로 끌고 가는 육체의 병이 있다. 그런데 이 병이 또다른 시를 낳았다. 송재학의 시 '병과 스승의 세상-엄원태에게'(현대시학, 11월호)가바로 그 시이다. 내용은 이렇다.
시인 자신으로 추정되는 시적 화자를 포함해 다섯명의 시인이 동강과 정선 아라리로 유명한 정선을 승용차를 이용해 다녀오는 길이다. "차는 급커브를 통해 아픈 너에게로 갔다"는 표현에서 알수있듯이 급커브때문에 차안에서 타격을 받은 육체의 고통때문에 자연스레 화제가 엄원태의 병으로옮겨간듯 하다.
이때 엄원태는 시적 객체로 기능하면서 엄원태가 시적화자에게 한 말 "채근담의 '병이 스승이다"라는 말을 너로부터 들었다'는 진술이 시의 전면을 지배하게 된다.
■소멸·허무에 끌린 육체
사실 여행이나 질병이 일상에 바쁜 현대인에게 잃었던 자아를 되돌려준다는 유의 진술은 보들레르 이래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시적 언표이다. 그러나 '병이 스승이다'라는 고사를 자신의것으로 육화하는 경지라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니면 그 정신적 공력이 어떤 경지에도달해야 하는지 평소 돼지처럼 건강한 나는 잘 모른다.
"십 년간의 투병생활을 너는 스승이 다녀가는 행로라고 말한다"
"신부전증을 앓는 너는 일주일에 세번, 매번 다섯 시간씩 쇠줄에 매달려 피를 맑게 해주는 강에몸을 담근다"
"매주 서너번 어김없이 방문하여 깊고 그윽하게, 올때마다 눈물겹게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병에경배한다"
"그것은 병의 가면이 아니라 스승의 얼굴"이라는 진술은 엄원태가 친구인 송재학에게 사사로이한 말이지만 송재학 시의 한 특징인 타인의 말을 빌려 자신 드러내기라는 시법에 의해 공적 환기력을 얻는 기호가 된다.
여기까지는 엄원태의 병 속에 들어간 송재학의 목소리지만 다음 구절에 다다르면 송재학의 육성이 직접 드러난다.
"병이 나으면 스승은 누구나 다시 경박해 지리라"
■마음속에 病 하나씩을
그렇다. 우리 삶이, 혹은 시가 터무니없이 경박해지지 않기 위하여 마음속에 병 하나씩은 키워야한다. 그 병의 이름이 반성이나 자기성찰인 것처럼 송재학이 보인 친구에 대한 우정도 사실은 우리에게 들려주는 반성적 사유의 활성화 고지서인지 모른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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