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이었다. 가슴을 쳐대던 자괴감. 끝모를 조바심, 턱밑까지 차오르던 숨가쁨. 지난 한해는 지난(至難)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무리했던 한국인, 뒤돌아 보기는 커녕 옆도챙길 사이 없었던 질곡.
그리고는 그 대가 IMF, 열병. 이제 와서야 처진 어깨나 떼밀리다 옆 한번 돌아보지 못한 이기(利己)가 부끄러운 줄 문득 깨닫는다.
하지만 이제 다시 스타트 라인. 다시 일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비상해야 할 것 아닌가? 매일신문은 그 '뒤돌아 보기'를 일로 삼아 올 한해 이곳 저곳 저모습 이모양을 기록해 나가기로 했다.숨가빴던 날들의 반추를 위해, 다시 한번 일어서기 위해,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비상(飛翔)을 성취하기 위해.
이 기행에 함께 할 많은 독자들이 힘이 돼 주리라 믿으면서 길을 나선다. 〈편집자주〉문득 문경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사 IMF를 이야기 하지만, 문경은 이미 몇년전에그 비슷하게 처참한 상황을 겪었던 것.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문경은 이제 비전을 봤고 갈길을 정했다.
"캄캄했습니다. 사실 문경에선 그때가 IMF 상황이었지요. 34개나 되던 탄광이 모두 문을 닫았는데도 대체 산업 하나 없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장자광업소노조위원장을 20년간 지낸 박응화씨(55·문경시의회 의장)는 참담했던 그때를 몸서리쳐 했다. 50여년 문경 경제의 주류를 이뤘던 탄광업이 5년 전 은성광업소 폐광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었을 때는 불야성을 이뤘던 문경의 밤도 암흑으로 변했다고 표현했다.
"폐광 시작 전인 89년도까지 문경에선 6천여 광원이 연간 2백40여만t의 무연탄을 생산했습니다.가족까지 2만명 이상이 탄광으로 산 것입니다. 광원 한달 월급만도 공무원 봉급의 3, 4배나 됐지요. 자연히 검은 노다지를 찾아 술집도 번성했고… " 문경발전협 폐광개발분과위 김성환 위원장(61)의 말에는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는듯 했다.
옛 점촌 시내에 유달리 술집이 많은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종업원만 2백40명을 거느린 극장식 회관 '아마존'이나 요정 '이화장'은 전국에 유명했다는 얘기. 그러나 술집 아가씨들처럼, 지역 탄광에서 돈 번 이들은 대부분 서울로 떠났다. 심지어 산재환자 치료하며 살던 일부 의사들도 폐광과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 끼리 스스로 살길 찾기를 모색하는 것이 지상 과제였습니다" 문경읍 개발위 정두영위원장(56)은 그러나 이제 폐광의 충격을 맨몸으로 이겨내고자 했던 문경시민의 자발적 발전 의지를 칭송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뭔가 극복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일 터.충격에서 깨어나 정신을 가다듬는 데만도 2년여가 걸렸다고 했다. 96년도가 돼서야 민자유치 범시민 추진협이 창립되고, 가은 읍민들은 폐광진흥지구 지정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 단체는'문경발전 추진협'으로 통합돼 결집력과 행동력을 갖췄다.
평일에도 서울·경기·인천에서 승용차·관광버스가 몰려들고, 줄까지 서야 입장 가능한 '문경온천' 모습은 정위원장의 자신감을 실행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김경태 영업과장(51)은 지난해 11월 개장 2주년을 맞기까지 29억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주차장 한 귀퉁이를 차지한 전남 번호판의 아우디 승용차가 온천의 성공을 짐작게 했다.
개발촉진지구(96년) 및 폐광진흥지구(97년)로 지정된 이후 문경 곳곳에선 현재 4개 분야 56개 개발 사업이 한창이기도 했다. 상당수 기반시설이 완료됐고, 지금도 관광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첫삽뜰 날을 기다리는 사업도 숱하다. 한때 전국 두번째 크기의 탄전지역이었다는 느낌이 전혀 낯설정도로 말끔히 정리된 모습도 인상적이다.
폐광진흥지구 지정으로 산림법·환경법·관광법에서 정한 각종 제한 규정이 완화·특례 적용됨으로써 문경에서는 이제 무슨 사업이든 시작하기가 아주 쉬워졌다. 사업자에겐 특별 융자도 주어진다.
문경새재 종합 휴양단지에 썰매장과 수영장을 만들려는 송관선씨(문경시의원), 문경새재에 청소년수련의 집 건립을 서두르고 있는 박재의씨(57) 등은 모두 문경 출신의 첫 지역 민간 투자자들. 서울∼문경 사이를 2시간 50분에 연결하는 이화령 터널 개통도 큰 효과가 기대되고 있다.공간적 거리의 단축 못지 않게 심리적 거리 줄이기에 관심을 갖고 지역 발전을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다. "씨름 선수 아들 덕에 서울을 오르내리다 보니 5년간 8개의 전국 규모 씨름대회를 문경에 유치하게 됐다"는 음식업회 지부장 이재석씨(54), 제주도 명물'도깨비도로'가 문경에도 있음을발견해내 관광지로 홍보하고 시내 오정산을 신년 해맞이 축제터로 개발 중인 문경대 남태석 교수(36·관광경영과).
가은읍 왕릉리 옛 은성광업소 터에 세워진 석탄박물관에 거는 기대 또한 만만찮다. "갱도 일부를관람객 체험 구간으로 활용했다"는 이 박물관 담당 조성보씨(53)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신경 써 지은 품이 역력한 작품이다.
폐광과 함께 지난 95년도에 폐선된 가은선(주평∼가은) 문경선(진남∼문경)을 관광철로화 작업은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레일 사이에 잡초만 무성하던 폐철이 이달 중 관광열차 통행 시작을 위해선로 보수작업 계도차 소음에 덮여 있었다.
"그간 공을 들인 만큼 역내 카지노 유치도 90% 승산이 있습니다"…수시로 상경, 지역출신 공직자·기업인들에게 문경 투자의 당위성을 역설한다는 김학문 시장(64)의 호언이 꽤나 시원스럽다.최근엔 폐광지에 사업을 하겠다고 속여 주민들 돈 6천여만원을 떼먹고 달아난 사기 사건이 생기기도 했지만, 1천만원 대의 피해자 김윤기씨(48)는 오히려 담담했다. "돈이 몰릴 거라는 징표라고봐요. 민자 유치도 잘 될 거고 관광지 개발도 성공할 겁니다. 더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조건, 폐광을 우린 이미 견뎌냈잖아요"
돌아오는 길, 문경읍 고요리 단산 기슭 활공장(滑空場)에 떠오른 패러글라이더에서 취재팀은'관광문경'으로의 화려한 비상을 시작한'폐광 문경'의 힘찬 미래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IMF를 이겨내는 모양도 저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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