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파계사 설선당(說禪堂)뜨락에 서서 겨울햇살을 안고 선 겨울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지난 봄 여름 가을 내내 저 마른 나무가지 위에도 정말 꽃이 피고 잎이 달리고 열매가 맺었었던가 싶은 의심이 든다. 본디부터 또 억겁을 두고 저렇게 앙상한 나무로만 서있을 것같은 느낌이 들뿐 과연 새봄에 여린 잎이 돋아날 건지, 꽃도 예처럼 피어날지 속절없는 근심도 든다. 그 만큼 겨 울나무에는 메마른 절망이 두껍게 묻어있나보다.
지난 한해 우리 모두는 '언제 우리도 꽃피고 잎돋은 적이 있었던가'싶을 만큼 겨울나무같은 모습으로 살았다. 다시는 꽃도 피우지 못할 것 같은 절망 과 더 이상 잎이 돋을 것 같지않은 두려움으로 떨며 보낸 한해였다. 그러나텅빈 절망으로 서있는 것같은 겨울나무에도 산의 정기는 바람과 햇살을 불어 넣어 새순을 틔우고 기어이 꽃을 피워낸다. 그것은 부탁하거나 기도하지 않 아도 어김없이 들어주는 자연의 베품이요 섭리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산의 정기를 받듯 자신에게도 뭔가 그럴듯한 좋은 일이 일어나주기를 신불(神佛) 에 당부하고 기원한다. 처음엔 조금만 줘도 죽도록 감사 하겠다는 공손한 마 음으로 기원하다가도 세모에는 뭔가 덜 받아낸 듯한 표정, 욕심이 덜찬 아쉬 운 얼굴을 한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이 어제까지 다른 이가 누리던 것이며 언젠가 내가 다시 또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고 끝내 없어지게 됨을 깨닫지 못 하는 똑 같은 새해 꿈을 되풀이해 꾸는 것이다. 올 새해에는 좀 다른 꿈을 꾸어보자. 있음(有)이 곧 없음(無)이요 없음(無)이 곧 있음(有)이라는 유즉 무 무즉유(有則無 無則有)의 섭리를 아는 겸허하고 작은 꿈을 꾸자는 말이 다.
달밤에 대나무 그림자가 댓돌을 쓸어도 티끌이 일지 않고 달빛이 호수를 뚫어 비추어도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은유는 허(虛)를 실(實)로 보고 실을 허로 보는 미욱한 인간이 유(有)가 곧 무(無)임을 모르고 무(無)가 곧 유 (有)임을 모르는 걸 깨우치고 있다.
세상을 보라. 정치를 보라. 봄이 오면 벌나비가 꽃을 찾아 모이는 건 세상 이치인데 뉘라 어리석게도 나비보고 절 의(節義)없다 손가락질 할 것인가. 봄가면 꽃지고, 꽃지면 날아들 곳 잃는 나비를 굳이 어리석다 손가락질 해가며 탓하지 마라.
봄꽃은 절로 피고 지는 때를 스스로 이미 알고 있건만 사람은 한번 잡은 그 꽃을 50년쯤 피워두고 보고 싶어하니 유즉무(有則無)의 섭리 모르는 자의 어리석음 또한 시비할 바 아닌 것이다.
어찌 정치만이 그러하랴만 정초 정치판의 시작을 보건댄 만백 성이 겨울나무에 새잎 돋도록 만가지 꿈을 꾸고 있으나 깨달아야 할 사람들 이 몽매한 싸움에만 매달리니 모진 눈바람 건듯 부는탓에 백화(百花)가 덩달 아 시드는 꼴이다.
국회 529호실이 마굿간이면 어떠하며 외양간이면 무엇하 나. 소가 들어가 있어도 말(馬)있듯 하면 마굿간이요 말이 들어가 있어도 하 는 짓을 소하듯 하면 외양간일 뿐 어제까지 내손안에 있었던 권력이 오늘 허 무하게 없어짐을 세상이치이거니 삭이지 못하면 자물쇠 부수며 몽니를 부리 게 되고 오늘 권력이 내손 안에 있다고 견강부회 하기쉬운 것도 세상이치다.
여야에 당부컨대 모처럼 손에 쥔 봄 꽃을 여름 가을 겨울까지 피우려 도모하 거나 애쓰지 말 것이며 어제 갓 뺏긴 봄꽃을 잠시 남이 즐기는 걸 굳이 애닯 다 시샘들지 말라. 새해엔 벗은 듯 하면서 언젠가는 꽃피고, 잎 핀듯하다 언 젠가 또 나목이 되는 겨울나무에서 유즉무 무즉유(有則無 無則有)의 섭리나 깨치라.
- 독자여러분의 가정에 새해덕복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
金 廷 吉 〈비상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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