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학교를 살리자

하우스 농사 덕에 소득 높기로 소문난 성주. 참외 수확기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 소리까지 나도는 곳. 거기서 취재팀은 한 '사건'을 만났다. 군민들이 나서서 지역 학교를 살려내고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대구로 떠나 갔습니다. 청소년·젊은이가 떠난 뒤의 농촌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지역을 살리는 가장 밑바탕 되는 일은 바로 교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김건영(金乾永) 군수는 그래서4년전 취임하자 마자 이 일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고 했다.

목표는 역내 성주고교를 명문으로 만드는 것. 그래야만 군민들이 자녀의 대학 진학 문제에서 안심할 수 있고, 역내 초중학교에도 자녀를 믿고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해결돼야 어른도농촌에 마음 잡고 살 수 있을 터.

먼저 '교육발전 위원회'를 만들었다고 했다. 지역 유지들을 모으고 '내고장 학교 보내기 운동'도폈다. 그러나 쉽잖은 일. "거의가 냉랭했습니다. 3년을 애쓴 뒤에야 이제 싹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역민들은 3년 전부터 모금을 시작, 지금까지 3천여명이 참가해 2억8천만원이나 되는 기금을 모았다. 성주고에 진학하는 우수 학생들로 하여금 어떤 구애도 없이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게 도울양식. '우수 학생들은 모두 성주고로!'라는 명제가 전국에 메아리 치게 하는 것이 종국의 목표.

최성고 사무국장(44)은 "좋은 선생님을 모시기 위해 별도의 수당도 마련한다"고 했다. 선생님 모시는데도 온갖 정성을 들여, 작년 2월엔 교사 3명 초빙을 위해 군수·교육장·교장 등으로 특별인사위원회를 구성해 가동하기도 했다.

72년도에 4백50명이나 됐던 전교생이 94년도엔 1백80명까지 줄었던 성주고. 그러나 그런 노력에힘입어 20년만인 올해 처음으로 정원 2백28명을 넘겼다. 이를 지역민들은 '작은 기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감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농촌지역에서 학교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는 영양·청송을 다니면서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 영양군 수비면 소재지인 발리마을. 수비중고교 앞에서 슈퍼를 하는 문영란씨(45·여)는 '학교'라는말만 나오면 속이 탄다고 했다. "쉽게들 폐교를 얘기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일이지요. 학교가 없어지면 당장 버스가 절반은 끊어지고, 가게들도 문을 닫을 겁니다. 마을이 죽는거지요".면 전체 인구라야 3천여명. 6·25 때도 총소리 한번 제대로 들린 적 없다는 이 오지 마을이 이때문에 몇년째 시끄럽다. 제작년에만 면내 2개 초교가 문을 닫았고 올해 중학교 입학생이 28명에불과하자 중고교까지 폐교 위기감이 높아진 것.

전체 학생수가 2백여명으로 준 중고교를 지키기 위해 주민들은 '학교 살리기 운동'에 마음이 고단하다고 했다. 학교 서무실장 주헌석씨(49)는 "폐교 반대 위원회를 만들고 국회에까지 탄원서를내 지금은 학부모들이 남의 눈이 무서워 자녀를 다른 지역 학교로 보내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수비면을 빠져 나와 끊어질듯 이어지는 고개길 몇개를 돌아야 들어설 수 있는 곳. "여기도 마을이 있구나" 싶은 영양군 청기면 주민들 역시 '학교' 얘기에는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면내 3개 초교 통합을 앞두고 서로 자기 마을에 유치하려는 갈등을 5년째 계속하고 있는 것.

"이러다간 몇 안되는 주민 끼리 인사 조차 하지않게 될까봐 겁납니다. 서로 한치 양보도 없어요"교장으로 퇴직한 뒤 청북초교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금석봉씨(72)는 얼마 전 당혹스런 일을 당했다고 했다. 군수·교육감이 마을에 찾아와 학교 통합을 위한 주민 설명회 개최했으나 10분도안돼 학부모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는 것.

경북의 최북단 끝자락을 쥐고 있는 봉화군 춘양면.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어야 한다는 산간 마을에서는 그러나 또다른 성취의 기쁨이 흐르고 있었다. 학교가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면 소재지 마을 중간에 자리잡은 춘양초교는 외모가 하도 특이해 금방 찾기가 쉽잖았다. 붉은 벽돌로 치장한 외벽에 기와가 얹혀진 안방 같은 느낌의 건물, 공원처럼 꾸며진 정원, 높다란 시계탑. 입간판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귀향에 앞서 학교를 둘러 본 사람들은 곧바로 귀향 결정을 내립니다. 덕분에 작년부터 인구도 붓기 시작했지요". 장건진 교장(56)은 친근해 하는 주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느라 바쁜 길은 가지도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춘양초교가 변화의 몸짓을 시작한 것은 96년도에 전국 최초의 교육부 현대화 학교로 지정되면서부터. 이때부터 37억원이 투입돼 90년 역사의 학교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은 물론, 난방·방음 장치까지 완비했다.

첨단 기자재를 갖춘 어학실, 컴퓨터실·도서실도 속속 들어섰다. 앞으로 수영장·강당까지 갖출예정. 다음달이면 1백50석 크기의 소극장, 취미·교양 강좌를 열 수 있는 다목적실도 문을 연다고했다.

그러나 이 시설들은 아동들만 사용할 것은 아니었다. 주민 모두가 지역 문화센터로 이용토록 개념부터가 달라진 것. 그래서 이미 겨울방학이 시작됐는데도 학교 곳곳에서는 사람 소리가 끊이지않았다. 학교 살리기의 또다른 시도였다.

우리 농촌 인구는 벌써 30여년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처음엔 도시 일자리를 찾아서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나중엔 자녀 교육 걱정 때문에 이농했다. 성주 같이 도시의 몇배 소득을 올리는 지역이라 해도 '자녀 교육'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 때문에 지역학교부터 살리지 않고는 농촌을 살릴 수 없을 것이 뻔한 일.

그러나 이제 이 가장 중요한 문제에도 뭔가 가닥이 잡혀 가고 있음을 취재팀은 느낄 수 있었다.〈글·李宰協기자, 사진·朴魯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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