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종만(許鍾萬.63)씨가 사는 상주시 낙동면 장곡리는 야산을 뒤로 하고 탁트인 넓은 들로 남향해있었다. 어쩐지 가슴 가득 넉넉함을 채워주는 듯한 마을. "저 나이에 저렇게 천진하게 웃을 수도있구나" 싶은 허씨가 그래서 더욱 잘 어울려 보였다.
"앉아. 아, 한 30분만 더 있다 가요. 코리안 타임이라는 것도 있잖아" 해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엉덩이 들썩이는 취재팀을 허씨는 자꾸 주저 앉혔다. "좀 더 일찍 오잖고? 바로 앞 낙동강의 잉어찜이 일미인데..."
허씨는 경북대를 졸업한 뒤 38년간 서울 생활을 하던 사람. 2년반 전 정년퇴직한 뒤 일년여의 탐색 기간을 거쳐 '3백년 허씨 세거지'인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긴장이 없어 좋아요. 불안이 없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 덕분에 사색하고 책도 읽고..." 허씨는집만 나서면 차에, 소음에 시달리던 서울 생활이 얼마나 스트레스였던지를 얘기했다."퇴직 뒤 아침 등산하고 동창 만나고 하며 지내다 보니, '여생을 이렇게 보내서 어쩌겠나' 하는생각이 절로 들대요. 그래서 부부 둘이서 보따리를 쌌지. 처음엔 친구들이 '미쳤다'며 붙잡기도했지만, 이젠 서울 갈 생각 없어요"
동네 젊은 사람들이 지나치다 "술한잔 주시오"하고 들르는 것, 아침 식사 후 옛 친구들과 커피 한잔 나누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했다. 작년 처음으로 농사 지어 동생네.아들네에게 쌀을한가마씩 부친 일은 생각만 해도 즐겁고. "대구 사는 누님이 이제 고향 친정이 다시 생겼다고 이렇게 오시기까지 하잖았느냐"며 인사를 시키기도 했다.
박정섭(朴正燮.57)씨를 만나러 찾은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 대밭골. 이 산촌으로 겨우 차가 비집고들던 즈음 취재팀 중 누군가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우리도 그만두고 여기 머물러 삽시다" 양달 마을의 따스함, 들리는 것이라곤 대낮의 닭 우는 소리 뿐,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가녀린 개울물 소리. 이런 걸 고즈넉하다고 하던가?
박씨 집이 주는 느낌도 그랬다. 잘 쓸린 앞마당, 장작을 땠음에 틀림 없어 보이는 포근한 방에서들리는 고부간 대화, 집 뒤에 둘러 선 대나무 숲... "꿈엔들 잊히리요"라며 고향 모습을 그린 어느싯구가 떠올랐다.
그러나 박씨는 그야말로 우리의 최근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산 경우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인근부포리에서 집안 농사를 돕던 그는 17세 되던 해부터 외지를 떠돌기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 찾은곳은 경기도 문산의 통일로 공사판. 이어 강원도 광산으로 옮겨 다니고, 남들 처럼 군대에 갔다."가난 때문이었지요. 3형제 맏이로 어디든 살 구멍을 뚫으려 다닌 것입니다" 제대 후인 68년도에영월 대한중석에 들어 갔다가 72년도에 다시 귀농했다. 그러나 그가 권리금 주고 장만했던 하천부지 농장은 안동댐 수몰 구역. 75년도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다시 고향을 등졌다."또 영월 중석광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12년을 일하다 87년도에 그만 뒀지요. 농토가 댐이 되더니, 중석광산 마저 사양화 되더라고요" 이번엔 부산으로 이사했다. 통닭집, 비디오 가게... 그러나결국엔 다시 공사판을 되돌았다.
"작년 봄에 귀농했습니다. 3남매 아이들이 모두 자라 결혼도 하고 해서 모친 모시고 살려고 집사람과 셋이서 돌아 왔지요. 작년 첫해 농사는 폭우.습해 등으로 망쳤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합니다" 박씨는 다시 농사꾼이 되려 애살을 쏟고 있었다.
이제 끝나가려 하는 연대 1990년대. 이 연대의 가장 분명한 한국적 특징 중 하나는 '은퇴세대'가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일 터. 60년대 중반 이후 농어촌을 떠나 도회지로 편입돼 갔던 '이농 1세대' 사람들이 농어촌으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산업화 시대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 청년으로 떠났던 사람도 있고, 어린 학생으로서 청운의 꿈을 안고 출발했던 사람도 있었으리라. 그러다 어언 30년. 그 사이 할일 다 하고, 아이들낳아 결혼.독립 시키고, 적어도 반은 넘게 쉬어 버린 머리를 인채, 그러나 고단한 바쁨을 뒤로 하고 그렇게 마음의 고향을 다시 찾고 있는 것이다.
대구 가톨릭 근로자 회관의 2개월 과정 '귀농학교' 김병혁 사무국장은 "작년 9월 운영된 1기 과정 때는 정원 50명에 63명이나 수료했고 그 중 상당수는 나이 든 은퇴 희망자였다"고 했다. '귀농'이라면 흔히 '생계를 위한 젊은 귀농'을 떠올리지만, IMF사태만 아니었더라면 은퇴형 귀농이 주류를 이뤘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은퇴'도 제각각 사정에 따라 여러 가지였다. 부산에서 가내공업을 하다 작년 8월 청도로 돌아 가 환갑의 나이에 1만5천평 산에 밤나무.감나무를 새로 심은 신인기씨. 그는 돌아갈 고향이 있어 다행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명예퇴직 후 의성 안계에 1천평의 논을 사 은퇴 준비를진행 중인 김영환(51.대구)씨는 고향이 현풍이라고 했다. "도시 생활 스트레스 때문에 40대 초반부터 은퇴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답은 자녀 교육 등에 모두 팔아 써버렸고, 고향에 다시 사려니 값이 너무 올라 포기했습니다"
취재팀이 만난 사람 중 조성규(趙聖奎.59)씨는 특이한 '적극적 은퇴자'였다. 황해도 연백에서 월남해 경기도 안성에서 성장한 그는 한양공대를 졸업한 전문 엔지니어. LG에 입사해 상무까지 지냈고, 릴 낚시기를 개발해 엄청난 수출고를 올렸으며, 자전거용 엔진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10년째 사는 곳은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호싯골.
"유럽 같은데 출장 다니면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지요. 만난 주요 인사들이 자연 속에서 흙냄새를맡으며, 자기 손으로 집을 가꾸고, 그야 말로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저게 바로 참답게 사는 것이구나... 하고요"
조씨는 '사는 것 답게 살기' 위해 도시를 떠난 경우였다. 이걸 위해 그는 몇년간 계획적으로 낚시.등산을 다니며 대상지를 물색하다 안동호 인접의 지금 집을 발견했다고 했다. "처음 여기 오자모두들 믿지 않았습니다. 그냥 객기 정도로, 별장 생활할 것 처럼 생각합디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매일 계획을 세워 하루 4∼6시간 일합니다"
6백여평 되는 집안이 그사이 정원 같이 꾸며졌고, 경운기에 관리기.건조기까지 안갖춘 농기계가없다. 운동 삼아 패 놓은 장작은 3년은 땔 수 있을 양. 그러면서 그는 "우리 부부 이제야 신혼생활 합니다"고 했다.
'나는/나와 나의 가족/그리고 나의 조국을 위해/최선을 다해 지게를 질 것이다/그리하여/후손들에게/부끄럽지 않은/삶을 살았다고/차분한 목소리의/말을/유산으로/물려줄 것이다' 마루에 걸린 자필 글귀가 조씨의 삶을 얘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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