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선율이 온통 지배했던 전 세기와 달리 20세기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음악을 지향하는 거장들을 낳았다. 벨라 바르톡(1881~1945)과 파울 힌데미트(1895~1963). 1930년대 서양음악사는 민족주의 음악과 실용주의 음악의 본격적인 정립을 이들의 공헌으로 기록하고 있다.헝가리태생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바르톡은 민족적 색채를 음악에 대입해 음악사에 새로운분수령을 이룩한 인물이다.
1903년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인생에 있어서 목적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선언하고있다. 바로 '헝가리와 헝가리인의 행복'이다. 이같은 목표는 그의 음악적 사고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다.
음악에 있어 진정한 헝가리 스타일을 지상과제로 삼은 바르톡은 친구 졸탄 코다이(1882~1967)와함께 헝가리민요의 뿌리를 조직적으로 조사했다. 일생동안 그가 채집한 민요는 헝가리에서부터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루세니아, 터키 심지어 아프리카의 민요까지 모두 1만4천여곡에 달하고 있다.
바르톡은 이 과정에서 하이든과 슈베르트, 브람스의 '헝가리풍'이나 리스트의 '헝가리광시곡'이얼마나 피상적인 음악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가 오랜 벽지농촌의 조사여행에서 발견한 것은 놀라울만큼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는 소박한 민족음악이었다. 이 음악들은 몇세기에 걸쳐 서양예술음악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않은채 원형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같은 그의 열정은 30년대어들면서 그 결정체를 보게 된다. 31년 출판된 논문 '농민음악이 현대음악에 끼친 영향'과 36년의 '민족음악 채집의 근거와 그 방법'이 그것이다. 이 논문에는 그의 음악적 자세와 체험이 강하게 녹아있다. 또 바르톡은 이 무렵 '현악기·타악기·첼레스타를 위한음악'(36년)과 '두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37년), '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39년)와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은 그의 음악인생을 어렵게 만들었다. 반(反)유태인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해온 바르톡은 33년부터 독일에서의 연주를 거부했으며 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그곳 출판사와도 절교를 선언한다. 조국 헝가리가 독일에 굴복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생각한 그는40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미국행을 선택한다. 45년 뉴욕에서 백혈병으로 눈을 감을때까지 일생의 목표인 민족음악에 대한 바르톡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독일태생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힌데미트는 바르톡과는 완전히 다른 기질의 소유자로인생의 부침에도 꿈쩍않는 실리주의자였다. 도장공 아버지를 둔 가난한 노동자계급이라는 가정배경속에서 싹튼 자립심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음악가의 인생을 시작한 초기의 힌데미트는 1차대전을 전후해 독일의 커다란 예술적 흐름이었던표현주의로 기울었다. 하지만 20년대 중반이후 그는 작곡가와 청중의 괴리감이 늘 마음에 걸려새로운 음악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7년에 출판한 중요한 저서 '작곡가의 지침서'에는 이런 음악에 대한 그의 내면적 갈등이 잘 나타나있다. 그가 시도한 대중적인 음악은 '실용음악'(게브라흐스 무지크)라는 즉물적 용어로 불리게 되는데 순수한 사회적, 예술적 소망에 의한 작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28년 힌데미트는 "작곡을 위한 작곡, 작곡지상주의 시대는 아마도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급한 일은 작곡가와 이용자 서로간의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힌데미트는 이말을 당장 실행에 옮겨 영화음악과 전기악기를 위한 음악, 아마추어 코러스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등을 쓰게 된다.
이후 이같은 선구적 시도는 나치정부에 의해 퇴폐예술가로 낙인찍혀 중단됐지만 그의 실용음악제창은 이후의 서양음악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30년대 전성기를 보낸 힌데미트는 16세기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생애를 제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오페라 '화가 마티스'(35년)와 이보다 먼저 완성해 초연한 교향곡 '화가 마티스'(34년)로 그뤼네발트의 유명한 이젠하임의 제단화(祭壇畵)를 묘사한 작품이다. 힌데미트는 이러한 표제적 내용을 도입함으로써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힌데미트는 한결같이 자연스런 스타일의 음악을 주장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명쾌한 것이었다. '좋은 음악과 결백한 양심'이라고 그는 늘 표현했다. 간결하고 명확한 선율, 예술가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배려등 힌데미트의 실용음악적 사고방식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청중과 교류하고 싶어하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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