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객석에서-'씬 레드 라인'

가장 격렬한 역사의 한복판에는 전쟁이 있다. 권력 혹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된 전쟁은 개인에게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강요한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개인은 그저 역사라는 기념비 밑에 생매장되는 존재일뿐이다.

그렇다면 전쟁은 인간 본성이 외화(外化)된 상황일까. 인간의 선함은 과연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것은 테렌스 맬릭 감독이 '씬 레드 라인'에서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2차대전중 남태평양 과달카날섬에 비행장을 건설해 호주 점령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육군을 상륙시켜 고지를 탈환한다는 표면적인 이야기 구조는 평범해 보이지만 '씬 레드 라인'은 걸작의 반열에 들 흔치 않은 전쟁영화임을 예감케 한다.

한두명의 초인적 영웅의 활약을 통해 전쟁을 이상화시키는 여느 전쟁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여러 인물의 관점을 다룬다. 죽음의 영적 진실에 다가가려는 위트, 전투의 매순간마다 사랑하는 아내의 숨결을 느끼는 벨, 개인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냉소하는 엘쉬 상사,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항명하는 스타로스 중위와 자신을 '누락된 자'라고 느끼는 고든 대령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번민에 찬 내레이션은 그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전쟁의 모순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스러운 내면 풍경은 섬의 평화롭고 무심한 자태와 대비되어 전쟁과 죽음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감독은 이에 대해 전사하는 위트의 모습과 그가 짧은 탈영기간동안 누렸던 부근 섬에서의 천상의 순간을 보여주는 화면을 교차해 보여주는 것으로 답한다.

'씬 레드 라인'이란 한계상황속에서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놓여진 종이 한장보다도 얇은 경계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놀라운 흡인력을 가지고 관객들마저 이 경계를 넘나들며 삶과 죽음, 전쟁과 유토피아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요구한다.

전쟁을 단지 전자오락게임쯤으로 여기는 관객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하겠지만 기라성같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적지 않은 즐거움도 누릴 수 있는, 놓치기 아까운 영화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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