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도농복합의 남촌 창녕

어릴 적, 따뜻한 바람이 불면 그건 으레 남쪽서 왔으리라 믿었다. 거기엔 그 바람 마냥 따사로운사람들과 좋은 풍광도 함께 있으리라…. 이름도 포근한 남촌(南村). 김동환은 거기에 '산 너머'라는 그리움까지 보태지 않았던가.

이제 3월. 봄. 남촌이 다시 우리 가슴의 삭막함에 거름 주리라 기대하는 계절. 대구의 첫 남촌은어딜까? 제대로 깨닫는 이 드물지만, 그건 창녕(昌寧)이다. 경남 땅. 그러면서도 경북의 군위보다더 가까운 곳.

꽃피는 사월이 아니기에 화왕산 자랑거리 진달래 향기도, 밀 익는 오월이 아니기에 그 넓은 들의보리 냄새도 없었다. 그러나 창녕은 이웃 도시들에 마음을 열면서도 오롯이 자신만의 것을 지키며 살아가려 애쓰고 있었다.

사실 이 땅에 들어서면서 취재팀은 나름대로의 선입견을 거미줄처럼 감고 있었다. 대도시 틈에끼인 땅이니 제모습이나마 제대로 가누고 있을까? 40㎞ 거리의 두 도시 때문에 지역 분해 양상을보였던 칠곡 비슷하지는 않을까…. 창녕읍을 기준으로 북쪽 백리엔 대구가, 남쪽 백리엔 마산이포진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오히려 그 대도시들을 거느리고 있는듯 했다. "사통팔달이지요. 대구· 마산 뿐아닙니다. 동쪽 백리엔 밀양, 서쪽 백리엔 합천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두루 백리'라 했지요.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 중심지입니다" 김진백(65) 군수는 그 지정학적 위치를 오히려 승화시키고 있었다. "60%는 대구에, 40% 정도는 마산에 생활권을 엮어 살아 갑니다. 대구의 백화점들이 세일하면 창녕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몰려 가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대도시로의 흡입 문제를 걱정하기는커녕 대구 지하철이 하루빨리 현풍까지 길어져 지역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구마고속도 4차로 확장으로 경북 청도보다 오히려 대구 접근성이 더 높아졌다고 홍보하려 애쓰기도 했다.

군민 중에서도 대구에 이질감을 느끼거나 마산 생활권화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호락호락 하지 않는 자신의 혼(魂)에 대한 믿음 때문일 터.

창녕은 삼국시대의 비화(非火)가야 '출신'이다. 신라에 병합된 아픔을 겪은 뒤 이를 되풀이 당하지 않겠다는듯 역사의 고비마다 투철한 저항의식을 내보여 왔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 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영남 최초로 만세운동 일어난곳이 바로 이곳 영산입니다"

61년도부터 38회째 잇고 있는'영산 3· 1 민속문화제'를 주관하는 이순경(64) 대회장의 자부심은대단했다. 매년 이 행사가 열릴 때면 창녕의 엄청난 응집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그는 단언했다.수천명의 군민들이 참여해 3월1일 여는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중요 무형문화재 25· 26호로 각각 지정된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 "애살과 신명, 그리고 서로 부딪치면서 상대방을 끌어 당겨하나로 만드는 '몰음의 놀이'는 만세운동 등과 관련된 지역 정신도 대변하고 있습니다".이를 방증하듯 호국 충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가을철 억새풀 장관을 자랑하는 해발757m 화왕산 정상에 버티고 있는 곽재우 장군 산성도 그 중 하나.

전형적 농촌이었던 창녕도 한 세대가 지나면서 이젠 전체 인구 중 58%만이 농업에 종사하는 도농 복합 지역으로 변했다. 군청측도 농공 병진책을 추구 중. 대구까지의 국도변, 거기서 마을들로이어지는 길가 곳곳이 이미 공장지대화 됐다. 그래서 3· 1문화제 대회장 이씨도 창녕 정신의 퇴색을 걱정하고 있었다.

63년도에 설립돼 전국 최초의 농민단체로 기록되고 있는 창녕 경화회 이용호(67) 회장도 비슷한걱정을 하고 있었다. "13명으로 출발해 지금은 회원이 1천300명이나 되지만 단결력이 옛날만 못하고 잔인정 역시 줄어 드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그는 농촌으로서의 발전 한계를 받아 들이며냉정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큰 공장이 아쉬워요. 대합면 땅은 비산비야인데다 35%가 국유지여서 공단 세우기엔 더이상 적지가 없는데…" 자꾸 대구· 마산으로 빠져 나가는 젊은 사람들을 붙들 뭔가가 있어 줘야 한다는것.

한때 국내 온천의 대명사 격이었던 부곡도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물상(物象)의 쇠락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느끼게 할 정도.

"겨울 성수기이지만 평일엔 숙박객이 10%선에 머뭅니다. 대다수가 적자 경영이어서 올 여름이면적잖은 업체가 문닫을 겁니다" 부곡 관광협 김덕수(53) 사무국장이 가슴 밑바닥에서 끌어 올린한숨이었다.

북새통을 이뤄야 할 '관광특구'가 철 지난 바닷가 마냥 적적함에 휩싸여 있었다. 1급호텔 숙박료가 8만여원에서 그 절반 이하로 내리고, 온천탕 입욕료도 일반 목욕탕과 같아져 있었다. 그런데도다른 지역 곳곳에 속속 개장되고 있는 온천으로 돌리는 이들의 발길을 되붙잡기엔 역부족이라고했다. 매년 400만명 이상이 다녀가던 것은 아! 옛날.

하지만 이즈음의 우포늪 부상은 창녕이 또다른 변모를 성취할 가능성을 열어 준 것 같았다. 대합· 이방· 유어면에 걸쳐 있는 국내 최대 자연 늪지. 자생하는 고니· 가시연꽃· 물방개 등 342종의 희귀 동식물이 세계적 명소화의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 2년 전 발족된 '푸른 우포 사람들'은 이미 회원 250명을 확보해 '철새 탐조 학교'등 각종 환경 이벤트를 통해 늪의 성가를 높이고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자연사 박물관 유치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중이었다.창녕읍 교리 고분군 등 가야시대 문화유적, 신라시대 문화재가 도처에 널려 '제2의 경주'라 불리는 창녕. 여기에 화왕산, 정신 유적, 자연 보고 우포늪이 보태지고 부곡에서의 온천욕까지 더해진다면 어느 지역 못잖은 풍부한 문화· 관광 자원. 창녕은 21세기가 열리기만 기다려온 잠룡(潛龍)이 아니었나 싶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