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11)동해안-'어협불똥'넋잃은 어민들

뿌리지 않아도 거둘 수 있는 곳. 바다. 가을 들녘이 넉넉함으로 느껴지듯 바다를 고향으로 가진 이들에겐 '바다'란 풍요를 의미한다. 경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동해. 요즘 그 동해 바다가 술렁이고 있다. 흙냄새를 좇아 농촌을 돌던 취재진은 이번엔 동해로 향했다. "앞으론 막막합니다. 몇년뒤면 이곳 사람 절반쯤이 다른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어요". 포항시 구룡포항에서 만난 최상용(53)씨는 대뜸 가슴 답답한 말부터 털어놨다.

한·일 어업 협정으로 어장을 잃어버린 안타까움 때문이다.

최씨의 말처럼 구룡포항 어디에도 예전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더이상 정박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포구에 발이 묶인 선박들. 인적 소리가 잦아든 공판장.

"당초 계획이면 올해 이 공판장에서만 650억 가량의 물량을 소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배가 묶여 있으니 이젠 흘러간 옛 노래가 돼 버렸죠"

영일수협 김수동 지도과장(48)은 "한·일 어업 협정 이후 우리 어민들은 길 잃은 양 신세가 됐다"고 했다.

동해안 최대 어업 전진기지인 구룡포항에 적을 둔 20t급 이상 오징어 채낚기 어선수는 150여척. 여기에 자망, 통발 어선과 근해에서 고기를 잡는 1~2t급 소규모 어선까지 합치면 1천여척을 넘어선다. 하지만 어업 협정으로 이중 절반은 고철이 될 처지에 놓였다.

포구 한쪽에 위치한 경북 선원 노동조합 사무실은 흉흉해진 바닷 사람의 민심을 그대로 대변했다.

'고기가 잡히는 곳은 모조리 일본 바다가 됐으니 신식민지 조약과 똑 같죠'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린 버림받은 국민이죠'

바다에 있어야 할 선원과 선주들. 어장을 빼앗긴 채 대낮 사무실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심정은 이미 분노를 뛰어넘어 있었다.

하지만 대안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구룡포뿐이 아니다. 해안선을 물며 시원스레 뻗은 7호선 국도를 따라 올라가며 마주친 강구나 후포항 모두 '절망'에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

찬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울진군 후포항 위판장.

3월이면 이름 하나만으로 설명이 필요없는 '영덕 대게'가 쏟아지는 철. 하지만 설익은 기자의 눈에도 '대게' 같은 '대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기에 있는 건 작은 배들이 인근 앞바다에서 잡아온 겁니다. 오늘 나온 물량 전부를 합쳐도 지난해 20t 짜리 한척이 잡아오는 양에 못 미칩니다"

위판장 한켠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40대 아주머니는 "이젠 대게 구경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라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대게 어획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오키 군도' 어장이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위판장을 빠져 나올때쯤 '검찰 조사가 있으니 성게가 있으면 빨리 신고하라'는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성게란 대게 어미·알을 품은 산란기 게다.

후포 수협 관계자는 "아마 일본으로 배들이 나가지 못하면 가뜩이나 고기씨가 말라버린 연·근해 어장이 더욱 황폐해질 것"이라며 "조금씩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렇다면 '기르는 어업'이라 불리는 '양식업'은 대안이 될까.

동해안 양식장 중 오래 됐다는 영덕군 병곡리 '대왕 축양장'을 찾았다.

87년 문을 연 이곳에는 1천900평 수조에 7만여마리의 넙치가 키워지고 있었다.

"치어 생존율이 50%를 조금 넘어설 정도죠. 지난해엔 림프 바이러스가 유행해 성어를 눈앞에 둔 고기들이 한꺼번에 폐사했습니다"

축양장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이정열(35) 소장은 "전복 양식등 할만큼 했지만 양식업도 별다른 재미가 없는 분야"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부 차원의 기술 지원이 없는 탓에 각종 질병으로 폐사율은 높아지고 사료값은 뛰는 반면 양식장은 계속 늘어나 경쟁력이 사라졌다는 것.

50여개의 축양장이 몰려 있는 구룡포와 감포 일대도 상황은 비슷했다.

별다른 정화시설 없이 축양장에서 흘려보낸 물이 10여년 넘게 쌓이면서 인근 바닷물의 수질이 나빠졌을 뿐 아니라 넙치와 우럭등 양식 어종도 한 두가지가 전부."동해안에만 100여개가 넘는 축양장들이 똑같은 어종만을 생산하니 일이 될리가 없죠" 구룡포읍 석병리에서 대림 수산을 운영하는 오주범(54)씨는 "일본에서는 심해 어종인 다랑어까지 양식하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앞날이 없다"고 했다.

3일 동안 둘러본 경북의 바다. 동해의 '오늘'은 회색빛이었다.

하지만 바다를 떠날 무렵 취재진은 한줌 희망을 접할수 있었다.

보는 것 만으로 가슴 시원케하는 영덕군 명사십리. 이곳 한편에 수산자원개발연구소가 있다. 바로 바다의 미래를 키우는 곳. 지난해 11월 문을 연 이곳에는 250만마리의 치어가 자라고 있다. 아직 2, 3cm에 불과한 넙치와 우럭, 전복.

"4월쯤이면 이놈들을 우리 앞바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손바닥 만큼 성장한 모습이죠. 앞으로 우리 연구소에서만 매년 300만 마리가 바다로 방류됩니다" 연구소 최대봉(51)소장은 "시작은 늦었지만 그나마 이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이 큰 다행"이라고 말했다.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 평범한 진리을 망각해 온 시절. 그동안 우리의 바다는 고통으로 신음해 왔다. 이제 남은 상처를 떠안고 21C 미래의 바다를 일구는 것도 또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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