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랑군 어디 있었냐"…사학계 논쟁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 중 하나는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했다는 낙랑군이 어디였냐는 것이다.

기원후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재했다는 낙랑군은 그 위치를 어디로 확정하느냐에 따라 한국 고대사는 그 모습이 크게 바뀌게 된다.

우선 낙랑군의 위치가 정해지면 단군조선을 대신해 그 자리에 들어섰다는 위만조선, 나아가 단군조선의 위치까지 정해지고 그에따라 한국 고대사 영역 또한 확대되거나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낙랑군 위치논쟁에는 현 동북아 국가들의 이해관계까지 얽혀 있어 논쟁이 더욱 치열하다.

현재 남한사학계에서 정설로 통하는 '낙랑군=평양'이 결정적으로 굳어진 것은 일제때 조선총독부가 평양 일대에서 이른바 낙랑유물들을 활발히 발굴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런데 문제는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 등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을 비롯한 이른바 한사군이 설치되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중국 고대문헌이나 지리지에 나타난 낙랑군은 아무리 따져도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지역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윤내현 교수는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 등장하는 낙랑을 만주지역에 있던 한 무제의 '낙랑군'과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던 동이족의 한갈래인 '낙랑국'이라는 두개의 낙랑이 별개로 존재했으며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나오는 낙랑 유물은 후한 광무제가 낙랑국을 정벌한 흔적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지금의 북경 동쪽 근처 난하유역에 있었으며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최리(崔理)의 낙랑국'(國)이 있었으나 서기 44년 후한 광무제에 의해 정벌된뒤 중국 영향권에 편입됐다.

윤교수의 이런 주장에 대해 기존 강단사학계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으나 남한 학계에서도 이병도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서울대 출신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윤교수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