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노트-오부치의 '求明不見暗'

21일 합천 해인사를 찾은 오부치 게이조 일본총리 내외는 2시간여 경내에 머무는 동안 시종 밝고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세계 최고(最古) 목판 활자본인 팔만대장경을 둘러 보면서는 "놀랍다"며외경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국 문화를 이해하려는 듯한 열정이 배어 있는 모습이었다.주지인 보광스님을 비롯한 해인사측도 예의를 다해 이들을 맞이했다. 눈발이 날리는 꽃샘 추위였지만 해인사 내부는 그렇게 평안한 시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대웅전인 대적광전 앞에서의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오부치 총리 일행이 지나갈땐 주위를 관람하던 7~8명의 한국인 등산객들로부터 박수까지 받았다. 성숙함으로 봐 주기엔 약간의 치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어 보광스님이 대적광전에 대한 의미를 풀어주고 있을 때 날카로운 외마디 고함 소리가터져 나왔다.

한 여인이 "이 도둑×들"이라고 외친 것. 그러나 한국말이었기에 알아 듣지 못한 듯, 오부치 총리일행은 계속 보광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경찰은 재빨리 이 여인을 제지, 격리시켰다.

또다시 평온은 이어졌다.

오부치총리는 전날에도 유사한 경험을 했어야 했다. 경제단체장 주최 조찬과 정상회담 등에서 경제 지원과 우리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으로 환대받은 그는 오후의 고려대학 초청 연설에선 대학생들의 거친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신한일어협 폐기를 촉구하는 시위는 물론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와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등도 과거사 청산을 위한 사죄와 법적 배상 이행 등을 촉구하며 오부치 총리 방한 반대 집회와 거리행진을 가졌다.

오부치 총리는 해인사에서의 기념 휘호 교환식에서 '구명불견암(求明不見暗)'이라고 썼다. '밝은것을 추구하면 어두운 것을 들여다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가 이번 방한을 통해 일본을 향해 있는 우리의 두 얼굴을 여실히 목도했으리라 믿고 싶다. 명(明)이 일본과 그래도 이웃하려는 기류라면 암(暗)은 여전히 일본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일 것이다. 과연 그는 자신이 쓴 휘호처럼 어두운 곳을 세밀히 살펴보고 돌아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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