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 건축의 미학-(11)경주 양동마을

넓고 비옥한 안강벌을 품에 안고 해발 100m 남짓 나지막한 설창산과 성주산에 앞뒤로 기대어 터를 잡은 마을. 너른 평야를 내려다보는 산등성이에 빼곡한 옛 집들. 양동마을에 가면 우리의 옛 건축미가 손끝에 잡힌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안강읍에서 포항방향 28번 국도를 타고 10분쯤 가다 왼편으로 꺾어들면 봄비에 흠씬 젖은 자연은 사람 사는 집들로 또 다른 색깔이다.

낮은 구릉, 골짜기마다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오래 묵은 기와집과 초가들. 잿빛 기와와 누르스름한 초가지붕이 한껏 어우러져 고색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반촌(班村)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경주 손씨의 집성촌. 두 가문이 한 마을에 동거하는 희귀한 양성씨족(兩姓氏族)마을이다.

우리 역사상 위대한 성현, 학자 18인을 칭하는 '조선 18현'중 우재 손중돈(孫仲暾·1464~1529)과 외질인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낳은 땅이다. 크고 작은 150여채의 조선시대 살림집이 말 물(勿)자 형으로 뻗어내린 네줄기의 산등성이에 터를 닦아 특이하다.

우리네 전통마을 가옥구조인 배산임수의 남향집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초기 15세기부터 집들이 지어져 지난 500년동안 양반가의 원형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이씨 대종가 별당인 무첨당(보물 411호)을 비롯 이씨 파(派)종가 향단(香壇·보물 412호), 손씨 파종가 관가정(觀稼亭·보물 442호), 손씨 대종가로 조선시대 초기 목조건물의 특징을 보여주는 서백당(書百堂·중요민속자료 23호) 등 보물, 중요민속자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무려 스물일곱채나 몰려 있다.

가히 고건축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현재 200년이상 된 큰 건축물만도 30여채. 임란전에 지어진 살림집은 현재 전국에서 모두 10채 내외로 서백당(1458년), 관가정, 향단, 무첨당 등 양동에만 4채나 된다. 게다가 지방에 지어진 민간살림집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건축수준을 읽을 수 있다.

양동마을의 고가들은 손, 이씨 두 가문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상당한 재력을 겸비한 지주층이었던 이 두 가문은 조선조 유수의 명문가로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가문간 경쟁심리는 건축에도 그대로 배어있다. 가옥 입지선정에서부터 상대를 의식해온터라 건축구조까지 두 가문은 제각각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양동마을 건축에 담긴 성격을 '갈등구조속의 건축'으로 규정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교수는 "주어진 지형을 계급과 가문이라는 사회구조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이 양동마을 건축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두 가문이 벌인 건축경쟁의 백미는 양동 어귀 언덕바지에 자리잡은 관가정과 향단. 건축적 내용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관가정은 우재선생이 분가해 손수 지은 집으로 전해진다.

향단은 회재선생이 동생 이언괄을 위해 지어준 집으로 건축주인 회재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된 집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게 구별되는 것은 두 집을 이룬 근본적인 건축개념이다. 관가정이 논리적이며 규범적인데 비해 향단은 독창적이고 파격적이다.

1480년대 건립된 관가정은 마을초입 물봉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경사지를 넓게 깎아 단을 만들고 건물을 깊숙이 앉혔기 때문에 외형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길목에는 외거노비들이 기거하던 작은 초가인 '가랍집' 4채가 나직이 앉아 있다.

'농사짓는 풍경을 보는 정자'라는 뜻처럼 관가정 사랑채에 서면 안강들과 호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명문집안 대종가치고는 규모가 작고 단순하다.

口자형 몸체에 전면 좌우로 날개를 뻗어 누마루와 사랑채, 중문, 행랑채가 있고 안채와 뒤편의 사당이 전부다. 공간적인 변화가 무쌍하다거나 중첩된 형태미가 있는 집은 아니다.

옛 집으로는 드물게도 좌우가 거의 대칭이며 집에 비해 지나치게 큰 6칸 안대청은 비기능적이다. 이 집 건축의 핵심으로 손꼽히는 누마루는 두 칸 대청 아래 기단을 안으로 접어 넣어서 기둥을 내렸다.

사랑채 전면에 계자난간(목조각물로 장식된 난간)을 두르고 두개의 기둥을 노출시켜 누각의 형태를 얻는데 성공했다. 일상의 살림집과 일상에서 일탈된 정자라는 상반된 건축유형을 단순한 기법을 써 절묘하게 결합한 복합건축이다.

이에 비해 향단은 터잡기에서부터 좌향 정하기, 규모, 건축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관가정과 대립적이다. 관가정에 비해 두배가 넘는 규모인 향단은 외관과 건축수준에 있어서도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다.

구조는 경사지를 두 개의 단으로 나눠 윗단에 주요한 몸채를 배치하고 아랫단에는 긴 행랑채를 배열했다. 바짝 좁혀 세운 두 건물사이의 높낮이가 거의 한 층 가까이에 이른다. 집 내부를 들여다보면 구조기법에서 건축주의 표현적 의도가 확연히 감지된다.

행랑채까지 모두 원기둥을 썼고 사랑채 지붕도 부연(附椽·덧얹는 짧고 네모진 서까래)을 단 겹처마다. 모두 민간 살림집에서는 금기시됐던 최고의 장식이다. 관가정의 절제와 규범과 달리 향단에는 자기 과시와 개성이 번득인다.

향단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다. 마치 복잡한 미로같다. 복합적인 평면구조보다 동선체계는 더욱 복잡하고 단절적이다.

모든 건물이 하나로 연결돼 있어 몸채는 일(日)자형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파(巴)자형 평면이다. 몸채에는 안채에 딸린 안마당과 안행랑부에 딸린 중정 등 두 개의 중정이 있다.

일반 살림집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예다. 요즘 건축가들조차 향단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다고들 한다.

외적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내적으로는 갑갑하고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관가정이 외부적으로 폐쇄적이고 소박하지만 내적으로는 개방적이면서 경관을 끌어들이는 구조로 향단과 전혀 상반된다.

규범을 무시하고 인습을 거부하는 대담함, 그 자유로운 의지가 개성과 낭만이 넘치는 이런 건축물을 잉태했을까? 양동의 집들은 하나하나가 독립된 건축적 생각들이 빚어낸 건축작품들로 평가되고 있다.

남과 다른 개성있는 주거공간을 이루려했던 선조들의 풍류와 다양성이야말로 바로 양동의 집들을 주목하고 사랑하는 까닭이 아닐까.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