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산이 있고, 가슴을 뛰게 하는 바다가 있다.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내달리다 골골이 고운 수를 놓고,"콰르릉 콰르릉…"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여느 바닷가보다 억세게 들려와 밤새 뒤척이게 만드는 곳.
울진(蔚珍), 산림이 울창하고 바다에 진귀한 산물이 많다고 해 붙여졌다 한다. 이름과 어울리는 고장이 한 두곳일까 만은 이만큼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 어디 있을까.
그 빼어난 자연 한가운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원자력 발전소. 도시사람의 획일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나 대조적인 환경이 공존한다는 데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자연, 인공미(?)의 정점인 원전, 그리고 그것들과 부대끼며 사는 인간. 이들 3자간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무엇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가.
원전으로 가는 길은 여느 해안도로와 다름없이 운전자의 시선을 한쪽으로만 잡아당긴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울진읍에서 20여분 달리다보면 북면 부구리. 회색빛 일색이다.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원전. 칙칙한 빛깔이 보는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인간을 압도한다.
원전 뒷산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바로 앞에 원전 1∼4호기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너머엔 바다, 왼쪽 모퉁이엔 우리네 삶이 있는 마을. 지난 82년 원전이 자리잡기 전에는 나지막한 야산을 따라 태백과 연결되는 해안도로가 있었고, 도로양편에 울창한 솔밭과 하얀 백사장이 일품이었다는 주민 남두호(45)씨의 얘기다. 그대로였다면 해안선을 잘라놓지도 않았고, '관광울진'을 더욱 빛낼만한 장소였으리. 먼 훗날 이곳을 전력과 맞바꾼데 대해 어떤 손익계산이 나올까.
눈앞의 거대한 돔에 원자로가 들어있다. 원전의 위용은 순전히 돔에서 나온다. 하필 이것이 원자로에 채용됐을까. 돔은 안정적이고 미적 효과가 뛰어나 로마시대이후 건축에 빼놓을수 없는 양식이다. 김동원 원전홍보과장은 "돔구조가 외부충격을 흡수·완화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며 궁금증을 풀어줬다.
돔을 바라보는 느낌은 사람에 따라 크게 엇갈리리라. 스스로 환경을 앞세우는 이라면 거대한 '괴물'로 보일 것이고 전력의 유용성을 중시하는 이는 단순히 볼만한 건축물이라 할 것이다. 이 이분법적 사고는 울진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 같다. 원전옆에서 20여년이상 이리저리 얽히고 설키며 살다보니 자연스레 생겨난 감정이 아닐까.
우리네 삶이 다 그러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애환은 그 어느 곳보다 부침이 심하다. 원전으로 인한 위험을 경고하는 주민이 상당수이지만, 원전이 가져다 주는 이득을 앞세우는 이도 적지 않았다.
원전 정문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음식점을 하는 김모(32)씨.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먹고 살기 어려워 2년전에 고향에서 음식점을 시작했다"는 그는 원전옹호론을 폈다. "원전이 더 많이 들어서고 사람이 북적돼야 장사가 잘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루라도 빨리 5,6호기가 착공돼 원전직원이나 공사관계자들이 몰려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주위를 얼핏 훑어봐도 술집, 밥집만 수십개다. 불과 10년전만 해도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부구리가 4, 5층 건물이 즐비한 곳으로 탈바꿈하는데 원전이 큰 역할을 했다는 한전관계자의 자랑도 들려왔다. 무언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든다.
원전 가까이에 있는 북면, 죽변면 주민들은 원전으로 인해 유무형의 혜택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올해에만 지원금 75억원이 북면, 죽변면에 풀리고 울진군에는 특별지원금 167억원이 제공된다. 어쩌면 IMF시대에 꿈같은 얘기일수 있다. 원전에서 주민숙원이라며 툭하면 다리, 도로 등을 건설하는 바람에 북면에만 건설업자가 50명이나 된다고 한다.
죽변에서 민박업을 하는 강삼봉(79) 할아버지의 얘기는 더욱 꾸밈이 없다. "주위에서 기형 송아지가 나고 폭발하면 다 죽는다고 수근거리기도 하지. 우리같이 어려운 사람들이야 원전때문에 손님만 많다면 당장 바랄게 없지…"
원전 반대론자들은 한전측이 돈으로 주민들을 세뇌시키는 일관된 정책을 펴온 결과물이라고 했다. 원전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만 각종 혜택을 베풀고 지원을 해왔다는 주장이다. 몇년전만 해도 울진에는 원전반대 밖에 없었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내놓고 얘기할수 없었다 한다. 이제는 목소리가 다양해졌다. 얼마전부터 찬성자 단체까지 생겨 원전유치운동에 나서고 있다.
검은 플라스틱 안경테에 마른 몸매. 한눈에 열혈청년임을 느끼게 하는 원자력반대 투쟁위원회 사무국장 이규봉(33)씨. 무엇보다 원전으로 인한 가장 큰 폐해는 울진이라는 공동체의식이 깨진 것이라는 이씨는"좀 못살더라도 선후배, 이웃이 찬반으로 나뉘어 반목하지 않고, 정넘치는 고장이 됐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젊은이들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남면 산포리 김선길(33)씨는"정부는 2030년까지 울진에 모두 10기의 원전을 계획중"이라면서"울진의 살 길은 관광밖에 없는데 원전이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울진의 고민을 과연 무엇으로 해결할수 있는가. 산과 바다는 그대로인데 인간사(人間事)만이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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