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미국 땅에 막 첫발을 디딘 소련 안무가를 놓고 공연 관계자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리허설이 코앞인데 연습은커녕 무보(舞譜)조차 내놓지 않으니 도대체 어쩔 셈이지?" "글쎄, 춤 생각은 안하고 하루종일 음악만 듣고 있더라니깐"
그렇게 '세레나데'(조지 발란신 안무·1934)가 시작됐다. 막이 오르면 파란 달빛. 그 달빛을 거스르며 높이 손을 치켜든 여성들. 무용수들은 음악에 젖어들었다. 한폭의 그림. 그 그림과 같은 아름다움이 막이 내릴 때까지 일관된다. 안무가 조지 발란신은 무용수 하나하나를 '음표'로 삼아 무대 위에 차이코프스키의 다장조 세레나데를 '그린' 것이다.
누군가 발란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 자체로서 충분한 한 편의 발레를 굳이 '음악'에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발란신의 대답은 간단하다. "음악이 좋으면 좋을수록 안무도 좋아집니다. 만약 춤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눈을 감아버리고 음악에만 귀를 기울이세요" 사람들은 그를 종종 '발레의 모차르트'라 말하길 좋아했다. 참으로 발란신은 '음악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발레는 '보이는 음악'으로 '작곡'됐다.
조지 발란신(본명 조르지 멜리토노비치 발란쉬바쯔)은 1904년 1월 22일 제정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상당히 알려진 작곡가로서 코카서스 지방 민요수집에 큰 공적을 남겼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피아노 교사를 자처했다. 발란신의 이같은 음악적 배경은 훗날 안무가로서의 성향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발란신이 무용가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1913년, 황실 발레학교 입학을 꿈꾸는 누이 타마라를 따라 오디션 장소에 간 발란신은 평소 안면이 있던 교사의 권유로 시험을 쳤고, 정작 입학해야 할 누이 대신 동생만 덜컥 붙고 말았다. 그의 부모는 발란신을 직업군인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레학교에 입학한 발란신의 학창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학교에서 도망치기 일쑤인 그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붙임성 없는 성격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쥐새끼'라 부르며 따돌렸다. 그러나 1915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된 쁘띠빠의 '잠자는 미녀'를 본 발란신은 생애 처음으로 발레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의 눈이 비로소 발레를 향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에서 명성을 닦아가던 발란신이 인생의 전기를 맞은 것은 193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발레 학교(1948년 뉴욕 시티 발레단이 된다)를 창설하면서부터다. '발란신 스타일'을 대변하는 '플로트레스 (plotless-줄거리 없는) 발레'도 이 과정에서 확립돼,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이야기를 배제하고 의미마저 억제하는 발레. "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무용도 그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신의 말처럼 발란신은 추상적인 형태의 무용으로 순수무용에 접근했다.
발란신이 창조한 '아폴로', '아곤', '방탕한 아들', '세레나데', '당신의 발끝으로', '나는 천사와 결혼했다', '골드윈의 도락' 등 150편이 넘는 작품들은 세계 각국의 발레단뿐만 아니라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도 사랑받는 레퍼토리가 됐다.노인이 돼서도 '앉아서 지시만 하는 안무'를 거부하며 창의적 열정을 과시했던 조지 발란신. 1983년 4월 30일 그가 바이러스성 질환인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우리는 발란신이 자신이 창조한 병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申靑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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