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나무, 동백, 잣나무와 너도 밤나무. 수백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온갖 거목들이 지천으로 원시림을 이룬 섬. 시선 닿은 곳마다 발길 끝마다 그야말로 생태 공원이 따로 없다. 뭍에선 벚꽃잔치가 열리던 때 울릉에서는 동백이 지고 있었다.
하지만 답답했다. 육지 사람이 섬에서 일주일 이상 머무르면 볼거리도 갈곳도 없다. 비라도 내리면 그야말로 숨죽인 공간. 여기에다 섬을 찾기도 떠나기도 쉽지 않다.
울릉(鬱陵). 말 그대로 울창함과 답답하다는 두가지 의미. 울릉의 오늘을 말해준다.
답답하다는 말은 섬사람에게 바로 배로 이어진다. 그 옛날 목선에서 카페리까지. 뱃길이 3시간으로 줄었지만 그 답답함은 여전하다.
"섬 사람에게 배는 생명입니다. 미우나 싫으나 이 배가 없으면 섬은 끝장이죠"
포항에서 울릉을 잇는 썬플라워호에서 만난 정천영(40)씨. 울릉이 고향인 정씨는 뭍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섬을 떠난지 20년이 됐지만 지금껏 고향을 찾은 건 손 꼽을 정도"라는 정씨는 "배 타기도 힘들지만 결항일이 워낙 많아 선뜻 갈 마음을 먹기 힘들다"고 했다. 정씨 뿐 아니다. 육지 사람에게 배가 '낭만'이라면 울릉을 고향으로 가진 이들은 배가 '현실'이고 안타까움. 얼핏 스쳐온 길이지만 기자의 눈에도 그랬다.
울릉도에 가려면 우선 인내가 필요하다. 파도로 배가 끊기면서 3일만에 오른 취재길. 포항 여객 터미널에서 떡 하니 마주친 3천t급의 여객선은 보는 것 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배가 포항 앞바다를 빠져 나오면 이러한 감상은 곧 '멀미'라는 현실앞에 깨지고 만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 체면도 없다. 뒤엉킨 채로 때론 복도에 나뒹굴며 메스꺼움을 토해낸다.
"30년 동안 배를 탔지만 아직도 멀미를 합니다. 지긋지긋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참고 지내는 거죠"
선실에서 지긋이 말을 건네오는 50대 중년 남자. 사업 탓에 한달에 두번은 여객선을 타야 한다는 그는 "이 배가 없어질 뻔 했다"고 말을 이었다. 선주측이 적자를 이유로 고속 여객선을 다른 배로 바꾸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북서풍의 파도를 가르는 탓에 유난히 멀미가 심한 뱃길. 육지와 섬을 잇는 유일한 길이기에 섬 사람들은 '배' 이야기만 나오면 쉽게 흥분한다.
"지난해엔 배가 90일이나 끊긴 탓에 섬경기가 말이 아니었는데 배가 바뀐다면 관광객이 절반은 줄어들 겁니다. 그러면 앞날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어질 겁니다". 선실안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들.
50년전 1박2일씩 걸리던 연락선이 육지와의 삶을 연결하는 전부듯 2천년을 몇달 앞둔 현재도 섬사람들은 똑같은 '배' 이야기에 목을 메고 있었다. 뱃길이 멀어지면 그들의 '꿈'과 '희망'도 그 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울릉을 처음 찾은 외지인이면 한번씩 내뱉는 말이 있다.
'꼭 한번은 올 곳이지만 두번은 아니다' 물론 앞은 절로 감탄사를 불러내는 섬의 비경을 두고 하는 말. 하지만 육지와 쉽사리 이어질 수 없는 고립감과 자연을 빼곤 관광 산업의 기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실. 섬을 찾는 뭍사람에겐 거의 '고통'에 가깝다. 이것이 '관광 울릉'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삼선암과 코끼리 바위 등 섬을 수호하듯 바닷속 곳곳에서 솟아오른 기암 괴석들. 탁 트인 수만평의 초지가 가슴을 시원케 하는 죽도와 관음도. 가파른 경사를 가득 채운 동백과 고로쇠 숲. 이 사이로 숨은 듯 이어지는 태화령 고개. 여기에 성인봉을 뒤로한 나리 분지는 어떤가. 산 정상 20만평에 이르는 평지를 수놓고 있는 너도밤나무와 솔송의 원시림. 눈이 내리고 구름이라도 지나가면 달라지는 한 폭의 그림들.
이 아름다움이 뱃길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활주로를 닦자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됩니다. 10년전부터 공항 이야기가 나오고 지난해엔 정부에서 타당성 조사까지 마친 상태지만 아직도 논란거리입니다"
비행기가 뜨면 1시간 거리. 하지만 정종태(57)군수는 '활주로 건설로 인한 자연파괴가 우려스럽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자칫 외지인을 불러오기 위한 공항이 유일한 관광 자원인 섬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주장.
섬안을 연결하는 일주 도로도 섬사람에겐 애환거리다.
전체 구간이 40㎞. 그러나 지난 63년도에 착공한 뒤로 아직도 공사중이다. 2001년쯤이면 4㎞쯤 남은 잔여 구간 공사가 마무리 될 것이라는 군청 관계자의 설명. 이러한 배경 탓에 아직 섬안에 그럴듯한 호텔이나 콘도 시설 하나 없다. 하지만 '개발'의 바람은 불고 있다. 10여일전엔 도동에서 독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와 삭도가 등장했다. 도비와 군비 등 40억을 들인 시설. 아직 착공은 안됐지만 호텔 건립허가도 3곳이나 나 있는 상태. 군에서도 장기 계획을 세워 기반 시설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해의 울릉을 찾는 관광객은 20만명. '다시 오고 싶은 섬'. 몇년 뒤 섬 사람의 바람이 이뤄질까.
〈許榮國·李宰協기자 사진·朴魯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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