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18)낙동강 나루터

뱃사공의 구슬픈 노랫소리, 흐르는 강물에 눈길을 던진채 상념에 잠긴 나그네, 막걸리 주고받는 주막…. 낭만과 운치가 있고, 삶의 내음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곳. 흘러간 노래가사로만 남아있는 나루터의 풍경이다.

물론 이런 장면은 더이상 찾을길 없다. 긴 다리가 그자리를 대신했고, 세월의 흐름속에 아스라한 향수만 떠올리게 하는 나루터…그 흔적을 찾아나섰다.

불과 30, 40년전만 해도 낙동강가에는 수천개의 나루터가 흩어져 있었다. 산이 앞을 가로막고, 변변한 신작로가 없는 지역에선 다닐 만한 곳은 강밖에 없었으리라. 김해 하구에서 상주 낙동까지 '소금배'라고 불리는 크고 작은 교역선들이 수없이 오르내렸다.

낙동강 수운(水運)사를 연구하는 향토사학자 박호만(71)씨의 설명. "예전에 낙동강은 지금보다 훨씬 넓고 깊었어요. 소금배들이 하류에서 올라오면 왜관 인근의 마을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나루터로 몰려들었죠. 소금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얕은 곳을 지날 때면 수부 7,8명이 '영차 영차'하며 배를 밀고 당기는 모습이 큰 구경거리였습니다"

나루터는 80년대초까지만 해도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왔다.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고 낙동강 제방공사가 끝날 무렵에는 효용가치가 완전히 상실됐고,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안동 하회마을에는 몇년전만 해도 나룻배가 있었다. 하회마을과 꽃내천(花川)건너 서애 유성룡선생이 머물던 옥연정사를 오가는 배였다. 유시주(57)씨는 "저녁 노을이 질때 마치 꽃이 깔려 있는 듯한 강위에서 박주(薄酒) 한잔 걸친 사공이 삿대를 쥔채 뱃노래로 시름을 달래는 광경은 일품이었다"고 회고했다.

마지막 사공 권용득(78)할아버지가 몰던 나룻배는 3년전 물이 불어 떠내려 갔다. 안동시나 하회마을 관리사무소는 권할아버지가 다시 삿대를 잡기를 바라고 있다. 관광지로서의 가치와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다. 권할아버지는 "30여년 사공일을 했지. 다시는 그일을 안할거야"라는 말만 툭 던지고 자리를 피했다.

하회마을 관리사무소측은 "강건너에 유적이 많아 나룻배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많지만 권할아버지의 입장, 관광객의 안전문제가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이무기의 전설이 서려있는 안동시 용상동 선어대. 그곳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나룻배가 지금도 운행되고 있었다. 아직도 다리가 없는 마을이 있다는게 놀랍기만 하다. 반변천 건너 40여가구가 사는 남선면 신석2리 주민들은 안동시내로 가기 위해선 나룻배를 타야한다. 나무배가 아닌 오렌지색 페인트가 칠해진 철선. 마을노인들이 100여m의 강양편에 걸려있는 밧줄을 힘겹게 당기며 오가고 있는 모습에 자못 비장함이 느껴졌다. 한 할머니는 "이곳은 섬이여, 섬. 마을 사람들은 제주도라고 부르지"라고 했다. 나루터의 낭만은 커녕 생활의 불편함으로 인한 씁쓸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안동시관계자는 "강폭이 넓어 100여 주민을 위해 큰 다리를 놓기에는 너무나 비경제적"이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낙동강의 으뜸가는 나루터였던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강은 여기서부터 깊고 넓어져 자연스레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됐다. 강건너엔 상주시 낙동면과 구미시 옥성면이 이웃해 세 고을이 손에 잡힐듯 맞붙어 있고, 대구, 군위 등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낙단교옆에서 대구식당을 운영하는 김판술(56)씨. 40년가까이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고기를 잡아온 그는 강의 변천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10년전에는 승용차 대여섯대를 실은 큰 발동선이 왔다갔다 했지. 89년 낙단교가 완공돼 그 배가 필요없어졌는데 장마때 떠내려가 왜관다리에 걸려있다 없어졌어" "30여년전 추석 하루 전날 창녕 남지에서 나룻배가 전복했는데 그때 60여명이 죽었어. 낙동강에서 발생한 사고중에서 제일 컸지"

3개의 강이 만나는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터. 나룻배는 80년대초에 없어졌지만, 낙동강 유역에서 유일하게 나루터 주막이 남아있는 곳이다.

수백년먹은 아름드리 회나무가 주막을 감싸 안은듯 서있고 흙벽에 함석지붕, 한평 남짓한 자그마한 방, 널직한 부엌이 주막의 전부다. 정감이 확 다가온다. 예전 많은 사람들이 붐볐을테지만 지금은 마을의 구석진 곳에서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나루터주막에서 만난 이마을 정강섭(63)씨가 들려주는 사공의 애환. "3대째 사공을 하던 진씨할아버지가 계셨지. 20년전 돌아가실 때까지 삿대를 놓지 않으셨는데 막걸리 한잔을 하고 삿대를 잡으면 언제나 신이 나셨지. 사람들이 강을 빨리 건너려고 건너편에서 '사공놈아'하고 욕을 해대면 '어떤 놈이야'하고 빨리 삿대질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

나룻배는 거의 없어졌지만 무심한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자연의 도도함을 다리라는 인공물이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감상을 가져본다.

----나루터 주막 지킴이 유옥련 할머니

50년가까이 나루터주막을 지켜온 유옥련(83·예천군 풍양면 삼강리)할머니.

"20, 30년전만 해도 막걸리가 없어서 못팔았어. 하루에 5말도 더 나갔지" 마음씨 좋은 유할머니가 회고하는 당시 풍경이다. 주막 마당에는 서울로 팔려가는 소가 가득했고 장꾼들이 여기저기 둘러앉아 떠들썩하게 막걸리를 마셨다고 했다.

6·25나던 이듬해 홀로 돼 4남매를 키우며 주막을 했다는 유할머니는 "나루터가 없어지면서 많이 적적해졌다"고 했다. 지금은 옛 얘기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는 동네 노인들과 여름철 가끔씩 들르는 관광객들이 주막의 손님들이다.

유할머니는 "나이가 먹어 이곳 저곳 안 아픈 데가 없다"면서도 "아들·딸네 집에 가있어도 이곳 생각이 나 하루 이틀만에 돌아오고 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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