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노트-박태준 총재의 침묵

6.3재선거를 앞두고 터진 고가 옷 로비 의혹 사건에 가장 당황했던 사람 중 하나가 자민련 박태준(朴泰俊) 총재다. 송파갑 선거에 신예를 내세워 야당 총재와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와중에 터진 선거판을 송두리째 엎어 버릴 대형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박총재는 당시 "선거를 어떻게 치르라는 말이냐"며 흥분했었다.

옷 사건이 김태정 법무장관 유임 정국으로 넘어갔을 때 박총재는 더욱 격앙됐다. 지난 1일과 5일 잇따라 열린 청와대 회동을 앞두고 박총재는 그때마다 당 부총재나 측근 특보들을 불렀다. 민심 동향을 파악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언을 할 것처럼 비쳤다. 이들은 '청와대의 독선이 민심을 거스르고 있다' '김장관이 정치적, 도의적인 책임은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잇단 회동에서 박총재가 민심의 실체를 제대로 전달한 흔적은 거의 없다.

박총재의 태도가 더욱 아리송해진 것은 7일 당 총재단 회의 때다. 김장관 퇴진론을 주장하는 부총재들의 말을 가로막고 경고성 발언까지 했다. 김장관 퇴진론을 꺼냈던 박철언,강창희 의원 등은 "한번 결정된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라"는 핀잔까지 들었다.

물론 공동정권의 파산을 가장 우려하는 박총재의 입장에서는 김대통령을 어떻게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박총재의 침묵은 이해할 수 없다. 공동여당의 총재라면 당연히 당의 소리와 민심을 김대통령에게 가감없이 전달해야 한다. 김대통령 주변의 보고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박총재가 김대통령의 '만남'은 지난 97년 도쿄 회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월드컵 예선 한일전 관람 후 그는 주변의 극심한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아무도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는 호기를 보이며 김대통령과 손을 잡았다. 지금 박총재에게는 당시의 용기가 필요하다.

박총재마저 입을 다물면 이 정권에서 누가 입을 열겠느냐는 게 중론이다. 박총재는 대선 직전 김대통령과 한 배를 탈 때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상곤(정치2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