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토요일, 26일은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흉한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한 지 50주기가 되는 날.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민족의 큰 별을 잃은 날이다.그의 일생은 우리 근현대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7세부터 73세까지 56년간 펼쳐진 그의 활동은 국내와 중국 활동이 각각 26년, 환국 후 활동 4년 등 세 시기로 나뉜다.
황해도 해주,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17세에 동학 접주가 되고, 18세에 농민군을 이끌었던 백범. 의병항쟁에 나섰고, 20세에 민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 장교를 죽여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옥하였다. 또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신민회 주역이 되고,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였다. 경무국장을 맡은 그는 임시정부와 동포사회의 안전을 책임졌고, 일본영사관 경찰과 치열한 첩보전을 펼쳤다. 이어서 내무총장, 국무령, 재무장, 내무장을 거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또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에 맞서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독립운동에 격정을 불어넣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피란길에 오른 백범은 1939년에 임시 수도 충칭(重慶)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백범은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좌파세력까지 포용한 합작정부를 일궈냈다. 그리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국내 진입을 꿈꾸었고, 연합군과의 공동작전도 추진했다. 그러나 결실을 보기 전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아쉬움을 남겼다.
백범은 1945년 11월 미국의 요구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를 개인이 아닌 임시정부 주석으로 받들었다. 일단 분단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남북협상을 밀고 나갔다. 그러다가 정적에 의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예상이 옳았다고 국민들이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5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준비되고 있다. 이 날을 기념하여 그의 전집이 준비되어 왔고, 여기에 동참해 왔음을 필자는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안동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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