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10)크래쉬

데이빗 크로넨버그감독의 '크래쉬'(98년 3월 국내개봉)는 피로 뒤엉킨 차 시트처럼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영화다. 자동차 오일, 피, 그리고 정액이 이 영화를 본 후 떠오르는 잔상(殘像)이다.

원작자인 소설가 J.G.발라드(73년 발표)는 "현대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최초의 포르노그래피"라고 밝히고 있다. 과도한 섹스신과 충격적인 소재로 인해 96년 칸영화제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국내에는 97년 부산영화제에서 소개하려다 심의문제로 상영이 취소되기도 했다.

'충돌'을 뜻하는 '크래쉬'는 비정상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여피부부가 자동차 충돌로 환타지를 즐기는 광신집단과 알게 되면서 느끼는 기괴한 성적 체험이 줄거리. 그러나 성적 이미지는 소재이고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문명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조소다.

특히 갖가지 상징을 통해 인간이 자동차에 함몰돼 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자동차를 애무하고, 자동차의 핸들을 어루만지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장면은 기계화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깊게 패인 상처는 자동차의 찢어진 문짝과, 광택 브래지어는 반짝이는 자동차의 본네트와 치환된다.

이 영화에서 자동차 충돌은 곧 인간의 섹스와 병치된다. 세단, 마쓰다 미아타(스포츠카), 컨버터블의 충돌은 곧 차주와의 섹스를 뜻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든 등장인물과 섹스한다.

그러나 국내 개봉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부분적으로 삭제됐다. 제임스 스페이더와 엘리아스 코테아즈, 로잔나 아퀘트와 헬렌 헌트의 동성애도 잘려나갔다. 1분 30초가량 되는 데보라 웅거의 전라장면도 통째 드러냈다.

'플라이''비디오드롬'등의 영화로 문명의 이기에 함몰돼 가는 인간을 그렸던 크로넨버그감독은 결국 성을 소재로 한 탓에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좀 충격적인 에로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金重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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