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서 남기고 자살…조선 청상과부 신원 확인

남편 잃은 슬픔과 아들없는 신세를 이기지 못해 5살난 딸과 시부모 앞으로 애절한 한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으로 여겨졌던 24살난 조선후기 청상과부가 누구인지 확인됐다. (본보 4월8일자 문화면 참조)

비운의 이 여인은 조선 순조 31년(1831년) 현재 발견된 유서 2통 외에 친정 부모 앞으로 유서 1통을 더 남긴 뒤 바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당시 조정에서는 이 여인의 높은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까지 내렸으며 보수파 계열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자신의 문집 노사집(蘆沙集)에 이 여인을 칭송한 글을 남기고 있음도 아울러 드러났다.

유씨부인이라고만 알려진 이 여인이 자살하기 직전 5살난 딸 팽아와 시부모에게 남긴 한글 유서 2편을 공개한 정신문화연구원 임치균 교수가 울산김씨 족보인'울산김씨소사'(蔚山金氏小史)와 전남 장성의 지리지인'장성읍지',기정진의 '노사집'을 대조한 결과 이 여인은 24살에 요절한 김응휴(金膺休·1806~1830)의 부인인 서령 유씨(1807~1831)임을 밝혀냈다.

특히 기정진은 '노사집'에서 "열녀유씨정려기"라는 글을 지어 이 여인의 정절을 높이 칭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임 교수는 덧붙였다.

노사집에는 서령 유씨가 승지를 지낸 유광천의 딸로 16세에 울산김씨인 김응휴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이 과거에 급제한 지 3년만에 요절하자 첫 기제사를 지내기 한달전에 자살했으며 당시 임금인 순조가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고 1839년 열녀문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사집은 "유씨가 시부모에게 사랑받았으나 남편이 병에 걸려 1년이 지나면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매일 새벽에 기도하고 약을 맛보며 정성을 다했다가 끝내 구하지 못했다"면서 "부인이 오직 딸 하나만 있을 뿐 아들이 없자 스스로 삼종의 도가다했다고 생각"해 딸과 시부모,친정부모에게 각각 유서 한통씩을 남기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특히 기정진은 이 글에서 집안사람들이 남편잃은 유씨부인이 자살할 기미가 있음을 알고 말리고 타일렀으며 부인 또한 시아버지가 마침 병을 앓아 자살을 포기한듯 했으나 시부모가 병이 나은 듯 하자 자신이 죽었을 때 염에 쓰라며 곁에 손수 바느질해 만든 내복 상하 한벌을 남기고 목을 맸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유씨부인이 남긴 유서 내용과 꼭 맞아 떨어지고 있다고 임 교수는말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자살한 이듬해인 1832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유씨의 외동딸 팽아는 나중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의 후예인 고광국(高光國)과 결혼했으며 그의 열녀문과 묘는 현재 전남 장성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임 교수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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