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르포-러시아 어장 출항 앞둔 구룡포항

80년대초 만 하더라도 동해안 최대의 어업전진 기지였던 구룡포항.그러나 올 3월 한.일어업협정 이후 이곳은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어자원 고갈로 10여년전부터 구룡포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한.일어협의 거센 풍랑은 읍 전체를 회생불능의 침몰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6일 오후 수협위판장에서 만난 어민 김일도(56)씨는 "유일한 생계수단이 고기잡이인데 이곳 떠난 다른 생활이란 생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일어협이후 이곳 대부분의 선주 및 어민들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했다.

옥토나 다름없던 대게어장의 전부와 오징어 어장의 절반을 일본에 빼앗긴 후 부두에는 6개월째 출어를 포기한 어선들로 꽉찼다. 요즘 구룡포에는 선원들이 남아돌고 있다. 10년전만해도 선원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 어려웠던 걸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만해도 선주들은 수백만원씩 선수금을 주고 부산 등 외지에서 선원들을 모셔(?)왔다.

그러나 이제 실의에 빠져 있는 어민들에게 한가닥 희망이 찾아왔다.

'러시아 어장 진출'이라는 돌파구가 마련됐기 때문. 이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우리 어민들 스스로가 대체어장을 개척했다 점에서 그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조업 경험이 없는 낯 선 어장인 만큼 위험부담도 크다는게 선주나 선원들은 한결같은 우려.

이같은 '기대 반 걱정 반'은 7일 오후 활어 위판장에서 열린 '러시아 어장 출어식'을 지켜보는 선원들의 표정에도 여실히 나타났다.

행사장 앞쪽 부두에 정박중인 '동건호' 갑판위에는 6, 7명의 선원들이 출어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판에 올라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고 '출어를 앞둔 솔직한 심정'을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여기저기서 거친 말투가 쏟아졌다.

배 탄지 20년째라는 동남호 기관장 공재곤(50)씨는 "원양 오징어때문에 현재 국내 오징어 가격이 바닥인데 러시아 가서 오징어 잡아와도 제 값 받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부산의 대형 원양선들이 뉴질랜드, 포클랜드 등에서 엄청난 양의 오징어(냉동)를 잡아오는 바람에 냉동 오징어 가격이 바닥이라는 것.

맛이 연근해산에 비해 크게 뒤지지만 원양과 연근해산을 구별하지 못하는 소비자들로서는 가격이 싼 원양 오징어를 사 먹는다는 설명이다. 공씨는 "원양은 연근해산보다 크고 질긴 편"이라며 오징어 고르는 법까지 알려 줬다.

구룡포의 오징어 채낚기(냉동)는 대부분 70~120t급으로 지금까지 대화퇴를 비롯, 한국이나 일본 연근해에서 조업하는 중형 어선.

본격적인 오징어 조업시기는 8월에서 11월사이 4개월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한.일어업협정으로 오징어 황금어장인 대화퇴와 연근해 어장의 절반정도가 일본 EEZ로 넘어가버려 그 만큼 어민들의 수입도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번 러시아 어장 개척은 구룡포 경제의 양대 수익원중 하나인 대게잡이가 아예 출어조차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오징어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

이번 러시아로 출어하는 36척은 모두 오징어 채낚기이다. 하지만 러시아 어장에 첫 출어하는 선원들의 걱정은 만선에 대한 기대보다 오히려 오징어 가격 변화에 신경이 더 쓰인다.

현재 원양 냉동오징어의 경우 1펜(16㎏, 30~35마리)에 1만4천~1만5천원선으로 연근해산 1펜(8㎏, 20~25마리)에 비해 무게가 두배나 차이 난다. 연근해산은 8월부터 본격적으로 위판되지만 원양보다는 가격이 비싼 편. 가격경쟁에서 원양산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120t 채낚기의 경우 만선시 1만펜(1펜 8㎏) 정도 실을 수 있는데 국내 가격이 1펜에 1만3천~1만5천원은 돼야 어느정도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것.

지난해의 경우 가격이 1만1천~1만4천원했는데 올해는 원양산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 만큼 가격이 어떻게 형성될 지가 관건.

동건호 갑판장 김차근(45)씨는 "정부가 원양 및 국내산 유통을 적절히 조절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까지 가서 오징어를 잡아와도 오히려 적자"라고 말했다. 여기다 중매인들의 농간 역시 가격하락을 부추기고 있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만약 구룡포 어선들이 타 수협에서 고기를 위판할 경우 다음번 위판시 반드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 1펜에 몇 천원을 손해보더라도 울며 겨자먹기로 소속 수협에서 위판 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

최근 어선수리를 하다 골절상으로 3개월 병원신세를 졌다는 김망구(38)씨. "보험회사에서 선원들은 위험부담이 크다며 책임보험(선원공제보험)만 들어주고 종합보험은 가입시켜주지 않았어요" 그는 "3개월동안 보험회사에서 나오는 58만원으로 네식구가 생활했다"며 정부차원의 보험 혜택 마련을 촉구했다.

선원 이달희(48)씨는 "선주가 출어경비를 마련못해 애를 먹고 있다"며 제때 출어 할지도 미지수라고 말했다. 고기가 많이 잡히고 고기값이 좋을때는 선주들은 보통 월 50~10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선원들에게 줬지만 이제는 옛말이 돼버렸다고 한다.

요즘은 생활비 지급은커녕 당연히 부담해야 할 출어경비마저 마련못해 일부 선주들은 1항차(한번 출어로 약30일 조업)시 200만~300만원 정도 드는 부식비를 선원들이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

출어경비는 원칙적으로 선주가 우선 부담해 왔다. 귀항후 위판액에서 제 경비를 제하고 남는 돈으로 선주 4:7, 선원 5:3 비율(과거 5대5)로 나눈다.

선원들은 출어전에 기관 및 조업 장비의 철저한 정비는 물론 각종 부식, 기름 등 챙겨야 할 준비물 또한 만만찮다. 한달간 소비되는 경유만 척당 200~300드럼(1드럼 200ℓ)이나 된다고 한다.

러시아 어장에 정식 출어는 오는 12~15일쯤 러시아 감독관이 도착, 승선해야 이뤄진다.

제355 장운호(선장 정평기)에 타고 갈 러시아 감독관(국경수비대 소속)과 통역관은 매일 어획량 등 입어조건 위반 여부를 체크하게 된다. 우리측은 감독관과 통역관에 대한 배려로 개인 침실 및 샤워장까지 마련해 주는 등 적지않은 신경을 쓰고 있다.

영일수협 김형준지도과장은 "선원들에게 러시아 감독관이나 통역관에 대한 예의 등을 특별히 교육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관에게는 하루 250달러의 수당을 지급한다. 통역관에게도 도착시 별도 수당 지급을 계약키로 했다.

야행성 어종인 오징어 잡이는 선원들도 기피하는 중노동이다. 여름철의 경우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4~5시까지 8~9시간동안 계속 된다. 오징어 떼를 만날 경우 담배피울 여유조차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오징어 조업기술은 일본 다음으로 세계 2위 수준.

가장 중요한 장비중의 하나가 자동 조상기. 대부분 일제로 한척당 보통 20대가 설치되며 대당 가격은 5만~600만원 선. 자동 조상기란 한마디로 자동 낚싯대로 낚시바늘을 매단 낚싯줄은 보통 수심 80~120m정도 내려간다. 자동 조상기에 내장된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낚싯줄의 하강, 상승, 회전속도 등을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한편 적지않은 경비를 들여 러시아 어장에 출어하는 우리 어선들은 과연 만선해 귀항할 수 있을까.

영일수협 한두봉상무는 "오징어가 황금어장인 대화퇴로 남하하기 전인 지금쯤 러시아 경제수역에는 오징어 어군 형성은 확실하다"며 만선을 점쳤다.

올해 상반기 구룡포 경제의 중심인 영일수협의 위판고가 지난해에 비해 절반이상 줄었다. 이때문에 하반기 사업계획의 축소 변경이 불가피하다.

이제 구룡포는 지금껏 가장 큰 효자노릇를 해온 오징어에 다시한번 사활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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