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게으른 탓에 정이 가는 것도 흘깃 보고 말다가, 얼마전 깨진 난화분에 나의 무심함을 깨우쳤다. 새삼 애틋한 마음이 들어 방바닥에 흩어진 작은 돌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주워담고는 그 가운데에 연약한 풀포기들을 세워 주었다. 그런데 오늘 그 난에서 꽃이 피었다. 세 포기 중 둘은 죽고 한 포기만 남아 화분이 허전하더니, 살포시 핀 한 송이 꽃 향기가 방 안 가득하다.
같은 화분 속에서 왜 두 포기는 먼저 죽어 버렸을까? 아니 어쩌면 한 포기만 운 좋게 살아남아 꽃을 피운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도 늘 이런 상황의 연속인 것 같다. 같은 화분 안에 있다가 뜻밖에도 나만 살아 남아 꽃을 피우거나, 때로는 정당한 이유없이 나만 시들어 버릴 수도 있는.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운(運)'이 따라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 믿음으로 사람들은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겠다고 하나보다.
나의 삶이 내 것임은 분명한데, 열심히 살려는 내 노력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운'이란 것이 나를 패배자 또는 행운아로 만든다면, 애써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의 의미를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공이란 '운 좋았다'는 말과 함께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깨어진 화분에서 운 좋게 살아난 한 포기의 난꽃이 그 좋은 '운'으로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불가(佛家)에서는 과보의 열매가 열리는 시기와 그 형태가 다를뿐, 자신이 지은 선· 악행의 대가는 반드시 받는다는 인과(因果)의 법칙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진리로 단언한다. 자신이 짓지 않으면 무엇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내 삶을 위해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운은 '노력'이다. 노력은 형편이 풀릴 때면 굴러온 호박을 내 품에 안게 하고, 어려울 때면 암흑에서 한 줄기 빛처럼 나를 끌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노력은 '주어지는 운'보다 훨씬 더 나의 편에 있는 것이다. 또한 운이란 노력이 주는 보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세상에서 말하는 부(富), 즉 살림살이를 깨달음의 정도로 물으며, '잘 살자'는 말로 청정한 삶을 다짐한다. 비록 지금 노력의 대가가 내가 원하는 것 보다 작아 보여도 감사히 여기자. 성공과 만족의 잣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니, 진정으로 잘 사는 살림살이 또한 내가 만드는 것이다. 노력의 편에서 '잘 사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다.
〈보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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