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폭우. 으르렁대는 천둥소리. 빗방울을 튀기며 황급히 멀어지는 발자국들. 누군가 흠뻑 젖은 채 도망치고 있다. 삐걱- 낡은 문이 열리면서 잠깐의 안도. 그런데 이 기분 나쁜 소리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저쪽에서…….
이 모든 일이 48초 동안에 일어난다. 당신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텔락 레이블이 지난 89년 발매한 공포 음반 '칠러(Chiller:공포물·서스펜스물)'의 머릿곡 '오프닝 시퀀스'. 여기까지는 '맛보기'다. 2번 트랙 '오페라의 유령' 서곡(앤드류 로이드 웨버 곡)이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쫓아온다. 당신이 도망쳐 들어온 곳은 텅 빈 극장? 아니면 으시시한 성당? 머리 위로 차곡 차곡 떨어지는 음산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스멀스멀 뒤따르는 '민둥산의 하룻밤'(무소르그스키 곡), '죽음의 무도'(생상 곡), '파우스트의 겁벌(劫罰:천벌·지옥)'(베를리오즈 곡)도 만만치 않다. 공포영화처럼 공포음악이란 게 있을까? 사실 공포심을 유발시키는데 있어 때론 영상보다 음향이 더 효과적이다. 백상어의 사진보다 존 윌리암스의 효과음악이 '죠스'의 존재를 더욱 현실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은 당신의 상상력을 더욱 더 자극한다. 공포는 알지 못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예상치 못했던 것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건성으로 들어왔던 클래식 음반에 상상력을 불어 넣어보자.
괴기설화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작곡가로 생상과 무소르그스키를 꼽을 수 있다. 할로윈 전날 교회 종소리가 멎자 무덤 속에서 죽음의 신이 나타나 바이올린을 켜며 비석을 두드린다. 그러자 어디선가 창백한 해골들이 몰려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것이 생상의 그 유명한 '죽음의 무도'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중 '산왕(山王)의 궁정에서'도 악령의 이미지를 그린 음악.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 베를리오즈의 '형장으로의 행진'도 빼놓을 수 없는 클래식 공포 특급이다.
불협화음과 무조음악이 난무하는 현대음악 쪽으로 넘어오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눈에 띄게 증가하지만 딱히 '공포음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지나친 무정형성이 상상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BMG가 발매한 'Momento Bittersweet(비통한 순간)'은 그중 눈길이 가는 앨범. 영화배우 록 허드슨·무용가 루돌프 누레예프·피아니스트 유리 에고로프 등 에이즈로 죽어간 예술가들을 위한 음악이다. 재능을 다 꽃피우기도 전에 이들을 저세상으로 데려간 에이즈를 증오하며 허쉬·올드햄·데 블라시오·개넌·햄픈 등 다소 생소한 이름의 작곡가들이 만든 이 앨범의 느낌은 '무섭다'기 보단 놀랍도록 '슬프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까? 5명의 작곡가 중 2명이 그토록 증오하던 에이즈로 목숨을 잃었다.
신비주의적인 공포를 체험하고픈 음반 마니아라면 엘렉트라 넌서치가 발매한 '미시마(Mishima)'를 권할만하다. 선혈이 뚝뚝 흐르는 듯 너무나 섬짓한 붉은색 표지디자인. 뉴뮤직 작곡가인 필립 글래스의 이 작품은 오래 전 일본에서 할복자살했던 기이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를 그린 영화음악이다. 군국주의와 개인주의, 칼과 펜을 조화시키는 환상에 사로잡힌 미시마의 광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요즘은 구하기 힘든 희귀음반.
공포음악 감상을 작정했다면 주의할 점이 있다. 절대로 볼륨을 처음부터 지나치게 올려놓지 말 것. 당신과 오디오 시스템의 건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칠러(Chiller)'의 음반 표지에는 '1번, 8번, 15번 트랙을 재생하기 전 주의하시오'란 경고문구가 삽입돼 있다.
〈申靑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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