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법원에 맞서 오랜 법정 투쟁 끝에 일본에서의 첫 한국인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재일교포 김경득(金敬得.50)씨.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법조계에 첫 외국 국적 변호사 탄생이라는 기록을 남긴 쾌거는 김씨가 지난 79년 한국 국적을 그대로 지닌 채 변호사 등록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육중한 일본 사법부의 문을 연 이 사실은 해방 후 재일교포 차별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재일교포 2세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를 계기로 지금은 해마다 2, 3명의 재일교포 젊은이들이 일본 법조계에 진출, 지금은 50여명이 일본 전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인권변호사인 도쿄 신주쿠(新宿)의 요츠야(四谷) 번화가 빌딩가에 '우리 법률사무소'를 열고 재일 한국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며 권익옹호를 위한 각종 사회활동을 펼쳐 교포사회의 희망이 되고 있다.
"일본의 차별 구조가 오늘의 저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법학을 전공했으므로 법조계에 진출해 한국인에 대한 차별구조와 맞서 다각적으로 싸우기로 결심했지요"
그의 부친 김석구(金石九)씨는 경북 군위군 의흥면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본에 가면 도랑에도 쌀이 흘러다닌다는 헛소문을 듣고 1927년 일본으로 건너 왔다. 그는 막노동 등온갖 일로 전전하다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식당을 개업하고 정착했다. 김변호사는 그곳에서 1949년 6남매중 넷째로 태어났다.
많은 재일교포들은 사회활동의 편의를 위해 어릴 때부터 자신의 한국 이름 외에 일본식 이름(통명)도 사용하고 있다. 그도 조센징에 대한 차별을 덜 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 방법을 따르며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1971년 12월 어느 날 대학 졸업반이었던 22살의 카지야마 게이도쿠는 한국인 김경득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취업을 위해 대학 상담실을 찾았던 그는 한국 국적으로는 정상적인 직장을 찾기가 불가능하므로 신체장애인 취업 명부에 등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민족적 차별에 대한 모멸감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인임을 숨기고 살았던 지난 세월은 자신의 생애에 없었던 시기로 선언했다. 사법고시를 목표로 정한 그는 일반직장 취직은 단념한 채 우유 배달, 공사판 인부 등 막일을 하며 집념을 불태웠다.
고시공부를 시작한지 4년째 되던 1976년 10월 465명중 38위의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2년간 연수를 받아야 하는 사법연수원 입소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됐다.
"예상은 했었지만 당시에는 암담했었지요. 그전에도 10명의 한국인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모두 일본 국적으로의 귀화를 조건으로 사법연수원에 들어 갈 수 있었지요. 그래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구조와의 첫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그는 국적을 바꾸라는 일본 최고재판소와 끝까지 투쟁하기로 하고 청원서를 내고 위헌성을 주장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일체의 한국적인 것을 배제하려고 애썼다. 일본인 처럼 행동하는 것이 습성이 됐다. 그러나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으로 가장하는 것은 대단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한국인임을 숨기며 소심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비참함을 참을 수 없게 됐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잘못이라기 보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시각과 제도 등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한국인으로써 일본의 사법시험에 응시해 합격했고 변호사법에는 변호사의 자격요건으로 일본 국적 조항은 없다. 내가 귀화하지 않고 일본 사법시험을 치른 것은 차별구조를 타파해 재일한국인 나아가 일본에 사는 외국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다. …중략…. 일본 최고재판소는 외국인 국적으로 시험을 치른 나의 사법연수원 입소를 허용해야 한다'
"당시엔 마땅한 직업도 없었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위해 와세다대학 청소부로 취직해 일하기도 했는데 청원서를 내고 나서 일본의 재야 법조인이나 교포사회 등에서 계속적인 지원 투쟁을 해 주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들에 보도되자 이번에는 일본 극우단체들로 부터 '건방지게 굴지마라' '이기겠느냐, 죽여버리겠다'는 등 무수한 협박이 들어왔다.
6개월 동안의 우호적인 언론 보도와 지지투쟁에 힘입어 국면은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일본 최고재판소는 대법관 회의 결과, 사법연수원 개소 직전 그를 한국인 국적을 지닌채 입소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 법조사상 처음이었다.가난한 농민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군위를 무작정 떠난지 50여년만의 일이었다. 김경득씨는 79년 연수원을 수료, 일본 사법부의 관문을 뚫은 최초의 외국인, 최초의 한국인 변호사가 된 것이다.
그후 그는 더욱 확실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 서울로 건너와 대학에서 한국의 법체계를 공부하고 돌아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재일 한국인들의 법적 지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사할린 교포 송환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중소이산가족회 사무실이 있는 대구를 몇번씩이나 방문하기도 했고 성묘를 위해 군위군 의흥면도 자주 방문했다.
재일교포의 역할에 대해 "가해자로써 진실된 반성을 거부하고 있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시정해야 하는 역사의 주인이자 증인으로써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그는 "국경의 벽, 국적의 벽이 무너지는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타국에 사는 정주 외국인들이 자국민과 대등한 권리를 취득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를 진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그의 계획은 후배 변호사들을 위해 한일관계의 가교 역할을 하는 종합적인 사무실을 설립하는 일이다.
그는 학창시절 오랫동안 복싱을 계속해 와세다대학 대표선수로 뛰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로부터 받은 차별과 멸시에 대한 울분을 샌드백을 치며 참아야 했고 일인학생들에게 좀더 강하게 보여야 했던 세월이었다.
한국에서 대학 연수시절 같은 지도교수에게 배웠던 손영란씨와 결혼, 아들 둘 딸 둘을 두고 있으며, 대학생이 된 아들도 재일교포 3세로서요즘 복싱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朴淳國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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