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일본 국왕의 항복 방송이 흘러나오자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렸고 한국인들은 함성을 올렸다. 36년간에 걸친 일본 식민지 노예의 굴레를 벗는 순간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240여만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고향과 가족을 그리던 이들은 일제히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귀국길에 올라 배를 탈 수 있는 항구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산에 가까운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나 정기연락선이 다니던 시모노세키(下關) 부두에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돌아오는 일본 패잔병들과 귀국선을 타려는 한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앞서 귀국했다가 되돌아 온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고국의 경제적 피폐, 콜레라 확산 등 어려운 사정에 대한 소문이 확대되자 그곳 항구도시에서 일시적으로 정착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에 대마도에는 약 2만명의 교포가 몰려 있기도 했고 후쿠오카(福岡)나 야마구치(山口), 북해도 하코다테(函館) 등 귀환선이 떠나는 항구도시로 집결했던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장기 거주하기도 했다. 그러한 연유로 지금도 이들 도시에는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재일교포들이 살고 있다.
한편 일본의 항복 선언 10일만인 1945년 8월24일 귀국의 꿈에 부푼 한국인 징용자 7천500명이 타고 있던 일본 해군 소속 4천700t급 전함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폭파 침몰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후 일본 정부는 미군의 기뢰에 부딪쳐 사고가 일어났으며 이 사고로 한국인 징용자 524명과 일인 승무원 25명이 숨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47년만인 지난 1992년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등 일제에 의한 계획적인 한인 징용자 집단 학살임을 밝혀내고 희생자도 5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후 유족회는 교토지법에 사죄 및 배상요구 소송을 진행함과 동시에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함구와 우리정부의 방치, 국민의 무관심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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