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교포들(3)-이충정 사장

지진이 많은 나라 일본의 건설회사들은 그들이 공사한 도로와 다리는 견고성 하나만은 세계적 수준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건설회사들도 일본 관청의 인정을 받고 관급공사를 따내기는 힘든 일이다. 특히 외국인인 한국인으로서 오랫동안 일본 관청의 공사를 수주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본 도쿄 인근 하치오지(八王子)시에서 관급공사만으로 현재 연간 외형 80억원의 실적을 올리는 경북 의성군 출신 재일교포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아오야마(靑山)국토건설주식회사를 경영하는 이충정(李忠征·58)사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씨를 만나기 위해 도쿄에서 JR 전철로 한시간을 달리는 동안 장대비는 줄기차게 차창을 두드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장실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한동안 비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세번의 밀항을 시도한 끝에 일본에 왔다고 털어놨다.

의성군 비안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상고 입학시험에 떨어지자 일본행 밀항선을 타게됐다. 일본에 살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시도였다.

조부 때부터 일본에 살고 있던 이씨의 가족들은 해방이 되던 1945년, 그가 5세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던 그의 아버지는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았고 농촌생활에도 적응치 못해 가족들을 남겨둔 채 조부가 살고있는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밀항선을 타기위해 한번은 모친과 함께 부산까지 갔다가 실패했고, 또 한번은 중학 2학년때 할머니와 함께 논 세마지기를 팔아서 돈을 지불한 뒤 밀항선을 타기로 하고 마산까지 갔는데 배는 오지 않는 사기를 당했다. 또 다시 그는 의성 사람 몇명과 함께 부산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밀항의 기회를 노렸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57년 5월 심야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10t 가량의 통통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나이 15세때 였다. 고기 담는 통속에 사람들이 채워졌다. 나중에 들으니 60여명이 함께 탔다고 한다. 낮에는 어선으로 가장하고 24시간을 항해했다.후쿠오카 해변에 도착해서는 물속에 내렸다. 바위틈에 숨어서 일본 현지 연락책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사흘을 굶은 일행은 할 수 없이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동네로 들어가 먹을 것을 찾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모두 경찰에 연행됐다. 함께 밀항을 시도한 60여명이 모두 잡힌 것이다.

곧 밀항범이나 불법체류자들을 가두는 오무라수용소에 옮겨졌다. 그는 부친의 주소를 적어 속옷에 꿰메어 두었는데 어렵게 연락이 된 부친이 면회를 왔다. 6개월뒤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었는지 보석금 10만엔을 내고 가석방됐다.

그는 일본에서 고교를 거쳐 아이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조부가 고물상을 했으나 어려운 형편이라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사장 막노동, 가정교사, 빌딩청소 등의 일을 다양하게 경험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취직이 안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중 도쿄에서 토목업을 하는 외삼촌이 공사장에 오라는 전달을 받고 삽질을 시작했다. 봉급을 받게 된 그는 경북 군위군 출신 서문자(徐文子)씨와 중매결혼을 한다. 부인 서씨는 그때부터 60명이 넘는 공사장 인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돈을 벌어 생계를 도왔다. 그는 당시 공사장에서 막노동하던 시기가 너무나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도로 공사에 필요한 기구를 움켜잡고 하루 종일 업드려 작업을 하고 나면 한동안 똑바로 설 수가 없었지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동료 인부들이 작업 태도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고 사장의 친척이라는 점 때문에 대충 시간을 때울 수도 없었지요"

그는 공사현장에서의 몸소 체험을 통해 토목공사에는 사심을 갖지 않고 완벽한 작업을 해야한다는 신조를 갖게 된다.

"한번은 공사 완료 기간이 임박해 사흘 밤낮을 쉬지않고 일을 했는데 나중에는 태양이 빨갛게 보이는 경험을 한 적도 있어요. 일본사람들에게 신용을 유지하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한번 신용을 잃으면 끝장이니까요"

어느 날 도쿄타워 아래서 도로 포장공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노신사가 와서 근처의 도로 수리를 요청해서 5천엔을 받고 일을 마쳤다. 결과를 본 그 사람은 도로 포장공사를 맡을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윽고 창업을 결심했다.

인부들에게 밥을 해주고 돈을 모은 부인이 내놓은 100만엔으로 1973년 아오야마(靑山)도로공업회사를 창업했다. 이어 아오야마 국토건설주식회사로 발전시켰다. 주 업종은 도로 포장, 하수도 공사 등 전문적인 건설업으로 따내기 어렵다는 도쿄시와 하치오지(八王子)시의 관급공사만을 수주하게 됐다.

관급공사에 있어서 신용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완벽주의로 신용을 얻었고 회사의 공신력을 꾸준히 높여 주위의 인정을 받았다. 젊은 시절을 공사판에서 보내면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됐던 그는 사장이 된 지금도 직접 공사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대한민국 민단 하치오지시 지부 단장도 3대째 맡고 있는 그는 동포들을 위해서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금은 재일교포들의 지방 참정권 획득을 위해 부지런히 뛰고 있다.

민단 지부에 약 1천500만엔(1억5천만원) 정도를 기부한 그는 한국인회관 건립을 위해서도 많은 돈을 냈다.

"지금은 회사를 둘러싼 환경이 전산화되고 첨단기술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나 그래도 이를 만지는 것은 사람이므로 인재를 중시하는 풍토 조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성공하리라는 믿음 하나로 밀항선에 올랐던 당시의 각오를 회상하며 어려울 때면 언제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다진다고 털어놓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