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토출신 재일교포들-(4)오기문 할머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오기문 할머니는 1911년 경북 고령군 쌍림면에서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17세때 공부를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토목사업을 하던 경남 합천 출신 배강이씨와 결혼, 일본으로 건너 갔다.

결혼 조건이기도 했던 공부에 대한 욕구는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 당시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모습들을 목격한 데서 비롯됐다. 마을의 최고 위치에서 체통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많은 머슴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 순사에게 구타당하고 피를 흘리며 묶여가는 모습도 봤다. 그 당시에 피지배 민족의 울분 같은 것을 느꼈고, 공부를 함으로써 그런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다짐이 생겼던 것이다.그때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신학문을 배우려 했고 시집보내겠다는 부모와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부친의 자살 소동 끝에 결혼 후에도 공부를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고 일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남편 사업이 안정되자 그녀는 일본 여자를 남편의 첩으로 받아들여 같이 살면서 요코하마의 공립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남편과 싸운 뒤 달아나 버렸고 시부모가 일본으로 건너와 모셔야 했으므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그런데 당시에는 불량배들이 많아 공사를 해서 번 남편의 돈을 그들에게 모두 빼앗겼다. 그녀는 공사장을 찾아가 불량배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고 두목과 의남매를 맺은 후 남편을 돌봐줄 여자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남편에게 여자를 구해준 두목은 다른 불량배들이 괴롭히지 못하게 했다.

1935년 공사를 완료하고 준공 검사와 공사비 받을 날만 기다리던 중 큰비가 내려 제방이 밤 사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 남편은 쇼크를 받아 빚더미만 남기고 심장마비로 숨지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시부모와 자신이 낳은 딸 둘, 30세의 작은댁과 그녀가 낳은 딸과 아들, 그리고 25세의 자신 모두가 생활 무능력자들 뿐이었다.

그길로 그녀는 작은댁과 함께 포목전에서 허드레천들을 사와서 여자용 속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당시엔 일본 여자들이 속옷을 잘 입지 않았는데 한번 입어보고는 만들기를 기다리다가 여러벌씩 사가곤 했습니다"

밤낮없이 열심히 재봉일을 하자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 날 일본 신문사의 기자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취재를 했는데 다음날 4대 일간지에 '일본 부인이 본 받아야할 조선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됐다. 그 기사는 당시 조선인을 멸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는 획기적이었다.

"기사가 나간지 며칠 뒤 포목점을 경영해 큰 돈을 번 제주출신 강희종이란 사람이 각종 고급 옷감을 한 달구지나 싣고 와서 아주머니에 대한 기사가 우리 동포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며 천천히 팔아서 원가만 달라고 했지요"

이를 계기로 많은 돈을 모은 그녀는 일본 도쿄에서 우리 한복을 만들어 팔기 시작해 유명해 졌다. 당시는 조선 옷을 입지 못하게 하려고 경찰까지 동원되던 시기였다. 그래도 많은 동포들이 한복을 입었고 수요가 있어 한복 만들어 파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녀는 음성적으로 조선의료소매상조합을 만들고 서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여력이 생기자 그녀는 억울하게 경찰에 잡힌 동포들을 뒤로 빼내오는 역할을 자주 맡아 '여변호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그녀는 교포사회의 여류인사가 돼 있었다.

1945년 10월말 일본에서 민족운동을 하다 투옥돼 23년간 옥고를 치른 박열 선생이 출옥하고 그의 환영식을 계기로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신조선건설동맹이라는 단체가 결성됐다. 이때 거금 60만엔을 박열 선생에게 전달했다. 그후 이 모임을 모체로 오늘날 민단으로 불리는 재일거류민단이 결성됐다. 그때도 그녀는 2백만엔의 기금을 쾌척해 민단 결성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에 동포들의 단결을 위해 민단을 결성하고 활동을 했는데 먹고 살기가 어려운 때라 남자들이 민단 일하는 것을 부인들이 싫어 했지요. 그래서 남녀 모두를 민단에 참여 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1947년 재일대한부인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는데 민단의 결속이 더 다져지게 됐습니다"

그녀는 윤봉길, 이봉창 등 3열사의 유골 봉환을 위해 40만엔을 찬조하고 직접 유골 봉환위원이 돼 어려운 절차를 겪으며 고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속임수에 말려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이 막혀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도착했다가 다시 부산으로 송환되는 등 천신만고 끝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민단 활동을 계속했다.

회장 재임 기간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문단을 구성해 일선위문, 위문품 보내기, 난민구제운동 등에 앞장서기도 했다. 1967년 7대회장까지 맡으며 실질적으로 재일교포 사회의 여성지도자 역할을 했다.

현재 재일대한부인회는 24대째의 회장이 선출됐으며 일본 전국에 46개의 지방본부와 3백20개의 지부를 두고 있을 정도로 성장해 민단 산하단체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88세의 그녀는 아직도 민단중앙본부 고문이며, 올봄엔 부인회 중앙회장 선거를 위한 선거관리위원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평생에 걸친 그녀의 '봉사의 삶'에 대해 조국은 1978년 대한민국 동백훈장, 1996년 대한민국무궁화훈장 수여로 화답했다.

1987년 70대 후반의 나이가 된 그녀는 자신의 전재산을 정리했다. 일본 조후시에 있는 현재의 거처인 작은 집 한채만 남기고 10억의 예산을 들여 그녀의 고향인 고령군 쌍림면에 사회복지법인 대창양로원을 지었다. 부실공사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지금은 사할린에서 영주 귀국한 무의탁 노인들 64명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평생을 동포를 위한 일을 했고 전재산도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됐던 무의탁 불우노인들을 위해 내놓은 것이다.

그녀는 지금 도쿄 인근 조후(調布)시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나도 이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됐지만 정신은 점점 맑아져요. 처녀 시절 공부하겠다던 집념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지금도 매일 공부를 하고 있어요"그동안 봉사하며 살아온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기록한 글들을 모아 최근 출간한 '오기문 회고록'을 펼치는 그녀의 백발은 햇살에 반짝였다.

朴淳國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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