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31)은둔의 고장 지리산(상)

지리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장부의 드높은 기세와 어머니의 품같은 포근함. 상반되는 이미지를 동시에 느낄수 있는 곳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단순히 높고 큰 산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역사적 현장. 그것이 바로 지리산의 힘이다.

분노, 이념, 사랑, 번뇌… 이런 것들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이곳보다 나은 곳을 찾을수 있었을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수양을 위해, 스스로의 인내심을 검증하기 위해, 혹은 신선(?)이 되기 위해 찾아들고 있는 것이다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지리산 도인마을' 청학동(靑鶴洞)으로 유명한 곳이다. 갓쓰고 긴 담뱃대 문 노인, 댕기머리 동자로 대변되는 청학동 사람들만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이곳은 은둔자의 본향이다. 골골마다 은거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부근에만 500명 가까운 은둔자들이 살고 있다. 면사무소에서 40리(16㎞)나 떨어져 있는 두메산골인데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속세를 등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참선, 명상, 단전호흡, 기수련, 동양철학, 역술… 수단이나 지향점은 제각각이다. 세상을 등진채 자신과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그것으로 기쁨을 얻는 사람들.

김기봉(53)씨. 서울에서 27년간의 교직생활을 팽개치고 2년전 부인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왔다. 남부지방에 호우주의보가 내린 지난달 31일.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지만 김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별천지라고 했던가. 비에 젖은 푸른색 대나무 밭 사이로 꼬불꼬불 난 길을 걷다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앞에는 대나무밭, 뒤에는 소나무 밭으로 둘러싸인 산중턱의 오두막 한채. 김씨 집앞에 서니 가슴이 뻥 뚫린듯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엄습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담장, 대문 앞의 자귀나무 한그루, 그리고 빗소리… .

마른 몸매에 맑은 눈빛의 김씨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방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중의 불청객들에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던 김씨는 비에 흠뻑 젖어있는 취재진들의 처지가 가엾게 보였던지 말문을 열었다. "산(山)이 자신의 가슴속에 들어와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알아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닌가. 그저 묵묵히 김씨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오십줄에 든 이제야 사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한때 산속에 들어오는 것을 망설였지만 매일 참선에 몰입하다 보니 이젠 도시에서 못 살 것 같아요"

김씨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9시 자리에 누울 때까지 정진하는데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2시간동안 참선을 하고 2시간동안 쉬거나 식사를 하는 일을 되풀이한다고 했다. 꽉 짜인 일과표에 맞춰 생활한다. "이를 엄격함 속의 자유라고 표현할수 있을까요" 사유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육체는 엄격하게 관리한다는 뜻이리라. 김씨의 말을 가만 듣고 있다 결국 속인(俗人) 티를 내고 말았다. "훗날 무엇이 남을 것이냐"는 질문에 그저 씨익 웃고만다. "자신의 근본을 아는 것이죠. 뭐 다른게 있겠습니까"

그와의 만남은 상쾌했다. 얘기중에 알아 듣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인생과 삶에 대한 화두(話頭)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얘기를 나누는 4시간동안 김씨는 단 한번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다. 그는 "눈은 마음의 창"이라면서 "부동심(不動心)만 있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청학동에서 큰 산을 하나 넘으니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 이곳에서 토굴 생활을 하는 60대의 비구니스님을 만났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주지를 했다는 그 스님은 "돈을 얼마만큼 시주하는 가에 따라 신도를 판단해야 하는 풍토가 너무 싫어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고 했다. '물은 잠깐이지만 산은 항상'이라는 진리를 음미하는 것이 하루하루의 행복이라고 했다.

신선이 되기 위해 입산했다는 40대 남자. "신라때 최치원선생이 이곳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됐죠. 누구라도 꾸준히 수련하면 신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24시간 내내 기(氣)공부를 하고 생식을 하면서 신선이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청학동 인근의 삼성궁. 이제는 관광지가 됐지만 빠뜨릴 수 없는 수도장이다. 청학동출신의 한풀선사가 87년부터 화전민이 버리고 간 폐허의 숲에서 굴러다니는 돌을 모으고 솟대를 쌓았다. 삼성궁은 한배임(桓因), 한배웅(桓雄), 한배검(檀君) 등 삼성(三聖)을 모신 순례지이자 민족정신 교육장으로 불린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도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도인풍모의 법사가 취재진에게 "단군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느냐"고 물었다. "안했다"고 답했더니 "취재하러온 기자가 조상에게 절을 안하느냐"고 호통이다. 서슬퍼런 도인의 위세에 눌려 서둘러 "잘못됐다"고 사과를 했지만 씁쓸했다. 단군 사당을 둘러보려면 반드시 절을 해야한다는 삼성궁 의 규정을 어긴 잘못이 있는터라 할말은 없었다. 그러나 존경과 참배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 누구에게 강요해서는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대중과 자신 스스로를 계도해야 할 그의 경직성에 마음이 걸린다.

수염을 멋지게 길러 도인처럼 보이는 40대 남자. 청학동 깊은 산중에 홀로 사는 그는 20여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주도(酒道)를 닦았다고 했다. 상대방은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혼자말을 되풀이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은둔자의 사회도 천차만별. 높은 것에서 낮은 것까지, 숭고한 것에서 왜곡된 것까지 다양하다. 고도의 정신세계를 탐닉하는 이들도 있고 오히려 사회의 모순을 힘껏 끌어앉은 듯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지리산은 이들 모두를 끌어안은채 어머니같은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

글: 朴炳宣기자·사진:鄭又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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