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땐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늘 이웃나라에 당하기만 할 정도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부드러운 산하를 닮은 순박한 인심, 이웃의 경조사를 내 일처럼 여겼던 상부상조, 그리고 은근과 끈기의 기질….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지난날 자긍심을 갖게 했던 그 모든 미덕들이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거꾸로 바뀌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싸움꾼 같은 언행에, 나 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더구나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하의 지금은 눈 뜨고도 코 베일만큼 도처에 사기꾼들이 넘쳐나고 있다. 국정을 주무르는 높으신 어른들이 밥먹듯 거짓말을 해대는 것도 지겨운데, 옷 로비 의혹사건으로 청문회에 불려나온 고관·재벌 부인들은 한술 더 떠 하느님을 들먹이며 거짓말을 했다.
그 어떤 사건에서도 "내가 잘못했습니다" 솔직하게 자백하는 사람이 없다. 예외없이 치사한 거짓말로 버틸 때까지 최대한 버틴다. '한번 오리발은 영원한 오리발'이라더니 거짓말을 덮기 위한 거짓말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런 우리 사회에서 아주 가끔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름도, 빛도 없는 사람들. 젊어서 남편을 사별했거나 이혼당한 뒤 평생을 삯바느질, 김밥 장사, 폐품 수집 등 막노동으로 뼈빠지게 일하며 피처럼 모은 전 재산을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위해 내놓으신 할머니들이다. 하나같이 맛있는 음식 먹고 싶고, 예쁜 옷 입고 싶고, 크고 멋진 집에서 편안히 살고 싶은, 몸의 욕심을 거절했던 분들이다. 시장 좌판의 2천원짜리 돼지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 30분이나 망설이다 돌아섰다는 한 할머니는 병든 노구를 위한 치료비가 아까워 병원에서 빨리 퇴원할 만큼 자신에겐 인색했지만 폐품 팔아 모은 억대의 재산 모두를 가난한 대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고 얼마전 세상을 뜨셨다.바로 며칠 전엔 일찍 홀로 되어 잠옷 장사 등으로 모은 전 재산 15억을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대학병원에 내놓았던 할머니가 타계하셨다. 아이를 못낳는다는 이유로 이혼당한 어느 할머니는 보따리장사와 삯바느질로 힘겹게 모은 수억대 재산을 고향 고교에 장학금으로 기증했다. 그 할머니 역시 생선 한 토막 쉽게 사먹지 않았고, 택시 한번 제대로 타지 않았다.
모두들 자신을 위해선 지독한 노랭이지만,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선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다.
아마도 할머니들은 어려서는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 받았을 것이고, 나중엔 남편에게 버림받은 소박데기로, 청상과부로 서럽고도 한많은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열 손가락에 금반지를 주렁주렁 끼고 호의호식하며 여생을 보내도 나무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그러지 않았다. 쓰라린 한(恨)의 세월엔 화해의 미소를, 자신들에게 무관심했던 이 사회엔 조건없는 큰 사랑을 보냈다. 혹독한 흑백 차별 정책의 피해자인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박해자였던 백인들을 오히려 사랑과 화해로 껴안았던 것처럼.
성서 속의 소돔과 고모라는 단 한 사람의 의인조차 없어 불의 심판을 받았다. 우리 사회가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등천을 해도 아직 건재한 것은 이 할머니들 같은, 소수의 의인들 덕분이 아닐까 싶다. 감동이 사라진 삭막한 이 시대에 우리를 눈물짓게 하는 할머니들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맑은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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