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아리따운 처녀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 승락까지 받아 놓은 행복한 남자. 그런데 그는 왠일인지 찬바람 휑한 겨울밤 그녀를 떠나려 한다. '발걸음 소리 들리지 않도록 살며시 그녀의 방문으로 다가가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적어놓고' 정처없이 떠나려는 것이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쪽지를 보면 내 사랑이 참됨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은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로 시작되는 유명한 노래 '보리수'가 수록된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의 첫곡 '안녕히'의 줄거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이 남자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머리가 몹시 검다는 것 뿐이다) 겨울 나그네는 사랑하는 여인을 버려두고 대책없는 이별 여행을 떠난다. '얼어붙은 눈물을 차디찬 얼굴 위로 흘리며'('얼어붙은 눈물' 중), '눈물과 함께 도시를 흘러 흥청거리는 거리를 지나'('넘쳐 흐르는 눈물' 중) 여행하던 이 바보 같은 젊은이는 급기야 '다시 한번 되돌아 가 그녀를 바라볼 수 있다면'('회상' 중)하고 후회하다가 '즐겁던 젊은 날이 차라리 싫어 죽어 땅에 묻힐 날만 기다려 지네'라고 노래하며 그만 옷걸이에서 떨어진 옷처럼 스르르, 허물어지고 만다.
이별과 후회, 집착과 미련. 이 유약한 감정의 악순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인류를 괴롭혀 온 돌림병인가 보다. '겨울 나그네'의 비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불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는 좀 더 각별한 사연이 있다. 동시대의 프러시아 시인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곡을 붙여 '겨울 나그네'를 완성한 슈베르트는 이 연가곡집에 특별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슈베르트는 매독에 감염된 상태였고, 결국 자신이 끔찍한 정신착란이나 치매에 빠져 죽음에 이를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분히 진부한 낭만주의적 성향의 곡들이지만 그 슬픔의 깊이는 시대를 넘어 애절하게 전해온다.
이별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 특히 직접적으로 이별을 표현한 가사에 곡을 붙인 성악곡들이 많이 있다. '겨울 나그네'가 있고,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말러 곡)가 있고, 삶과의 이별을 앞둔 심경을 노래한 '4개의 엄숙한 노래'(브람스 곡. 정말로 브람스다운 제목이다)가 있다. 오페라 아리아는 셀 수 없을 정도.
그러나 표제와 가사가 붙은 이런 음악은 가늘고도 모진 이별의 감정에 몰입하게 만들기엔 왠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이별을 감상할 수는 있어도 이별이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할까. 진정한 이별 음악은 설명이 아닌 상황이 주어지는 음악이다. 그 사람과 헤어지면서 박차고 나왔던 문 위에 작은 방울종이 매달려 있었다면, 고개 숙인 채 한참을 걸었던 그 거리에 남의 속도 모르고 구슬픈 유행가가 흘러나왔다면, 집에 돌아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억지로 라디오 소리에 몰입하려 했었다면, 그 모든 것이 두고두고 가슴을 후벼 파는 이별 음악이 될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신나는 댄스 음악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申靑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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