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된 1907년 당시 대한제국은 심각한 재정고갈 상태를 맞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조선 금융권을 완전 장악한 일본은 당시 국내 통화량의 절반에 가까운 1천150만원이란 거액의 차관 도입을 강요했다. 세관수입과 국고금을 담보로 화폐정리자금 300만원, 부채정리기금 200만원, 금융지원자금 150만원, 기업지원자금 500만원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러나 일제는 구전 명목으로 100만원을 뜯어갔고 이후 자신들의 국토측량비, 수도사업비, 관청수리비, 인건비 등으로 차관을 갉아먹었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국세를 담보로 차용증서만 썼을 뿐 돈은 구경도 못한 채'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외채는 당시 세입기준 1년 예산과 맞먹는 1천300만원으로 불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은 이같은 배경 속에 시작됐다.
보부상으로 출발해 대구에서 제일가는 거상(巨商)이 된 서상돈은 10세이던 1859년 어머니 김아가다와 함께 외가가 있는 대구로 왔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초기 교회사업과 자선사업에 헌신적이었을 뿐 아니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 가입, 애국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러던 중 경제주권 장악을 위해 차관 공세를 퍼붓던 일본에 대항하고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2월 출판사인 대구 광문사의 부사장인 서상돈은 광문사 문회(文會)에서 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빚을 갚자고 제안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땅을 내주어야 할 형편이니 2천만 국민이 담배를 3개월간 끊어 매월 1명당 20전씩 모으자는 것이었다.이 자리에서 서상돈은 거금 800원을 내놓았고 문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제안을 가결시켰다. 회원들이 중심이 된 국채보상운동 발기인들은 대구민의소를 설립하고 현재 대구시민회관 인근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었다.
빚을 갚아 나라를 되찾자는 정신에 감동받은 민중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앞다퉈 참여했다. 위로는 고종황제부터 선비, 지역유지, 영세상인, 짚신장수, 기녀, 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서 모금이 이뤄졌다. 운동 시작 1년6개월만에 모금액은 18만7천여원에 이르렀다. 결코 적지않은 액수였으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채를 갚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0년 총외채는 4천500여만원으로 3년전보다 3배이상 늘어났다. 게다가 일제의 교활한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은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퇴색된 것은 아니다. 전국민이 참여한 경제적 저항운동이란 점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일제 경제침략을 저지하는 구심점이 됐던 대구는 이제 투기자본의 광폭성에 맞서고 국제금융질서 재편을 위한 전세계 시민연대 결속의 한마당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서상돈 기념상 제정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열고 있다.
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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