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사회학자 앤터니 기든스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내부-준거적 체계(Internally referent system)라는 점에서 전통 사회와 구분된다. 이전에는 관습이나 전통, 아니면 자연의 명령에 따라서 이루어졌던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들이 점차 사회 체계의 내적 논리 속으로 흡수되고, 특히 감정, 성과 관련된 영역들은 이러한 내적 준거의 틀에서 성찰된다.
예컨데, 재생산(자녀의 임신과 출산)이 자연의 섭리이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성 역시 자연으로부터 이미 결정되어 주어지는 것이었으나, 재생산 없는 성(피임)과 또 성 없는 재생산(시험관 아기 등의 출산)이 모두 가능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성이 더 이상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결정하고 선택하는 문제로 변해 가고 있다.
한편 인간 관계 역시 더 이상 관습이나 전통에 따라 유지되지 않고, 각각의 개인이 그 관계에 부여하는 의미와 관계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그 형태와 존속 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한 번 결혼 했으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식의 전통적 결혼 관계가 관계 '외적'인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결혼 생활을 통해 줄기차게 배우자의 사랑을 확인하려 하고 사랑이 없다면 결혼 관계를 미련 없이 깨어 버린다거나 혹은 사랑하면 되었지 결혼이라는 형식이 왜 필요하냐는 식의 인간 관계는, 그 관계의 '내적'인 속성에 대한 당사자들의 판단에 따라 지속 여부가 좌우되는 것이다. 혈연에 의해 의무처럼 부과되던 친족 관계가 점차 엷어지고 친밀성과 애정에 기초한 순수한 관계가 더욱 중시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흐름이다. 기든스는 이처럼 관계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관계 그 자체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유지·변화되는 관계를 '순수한 관계'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대 현택수 교수의 해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든스가 말하는 '순수한 관계'란 형식적 결혼이나 가족제도에 의한 것이 아닌 감정적·인격적 유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친밀하고 지속적인 감정적 유대 관계야말로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지향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인간관계이다. 현대에 와서 사랑과 성은 점점 더 '순수한 관계'를 통하여 연결되고 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과 성이 결혼을 통해 연결되었지만, 현대의 사랑과 결혼은 '순수한 관계'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결혼' 그 자체보다는 '관계'이다. 이와 같은 순수한 관계가 지향하는 세계에서의 사랑과 성은 더 이상 유혹과 정복의 대상이 아니며, 결혼과 가족도 경제적 자유의 도피처가 아니다. 순수한 관계의 세계는 친밀감을 느끼는 개인들이 서로 사랑의 유대를 공유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협상해 가는 공간이다. 그것은 권위나 권력의 관계를 벗어나 남녀 간의 평등을 지향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수평적 친밀관계에 개입될 수 있는 모든 순수하지 못한 외적 요소들이 배제되는 공간이다. 이렇게 순수를 지향하다 보니 오늘날 별거와 이혼이 많아지게 되었다.
사회 조직 체계의 변화에 따라 현대인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별하고 감정, 사랑, 성, 결혼을 사적영역으로 분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인은 사적 영역에 관한 한 자신의 내부-준거적 체계에 의해 자아 성찰적인 사고를 한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개인적 행동의 자율성과 이에 따른 행복을 능동적으로 추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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