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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서상돈 기념상'제정 국채보상운동 그 뜻(하)

외환위기 직후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92년전 국채보상운동 당시와 너무나 닮은 꼴이다. 개항의 물결 속에 강압적으로 밀려든 차관공세와 무분별한 세계화 과정에서 유입된 단기외채가 닮았고, 정부 1년 예산을 웃도는 외채규모도 비슷하다. 담배를 끊고 금덩어리를 모아봤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더미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상황도 같았다.

차관공세를 실컷 퍼부은 뒤 이를 갚아보겠다는 민족운동을 탄압한 일제와 자기 잇속만 챙기기 위해 국제금융질서 개선을 도외시한 채 국내 구조조정만 강요하는 선진자본국은 '채권자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 도덕적 해이)'란 점에서 똑같다.

그렇다면 미완의 거사로 끝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나라가 진 빚을 갚겠다는 채무자 모럴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는 국채보상운동의 필요성을 알리는 취지문이 실렸다. '2천만 인중(人衆)으로 하여금 3개월 한하여 남초(南草)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20전씩을 징수하여 계산하면 거의 1천300만원이 됩니다. 우리 2천만 동포중 진실로 일호(一毫)의 애국사상이 있는 자이면 반드시 두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국민이 나라사랑에 나섰다. 서울지역 부인감찬회는 아침 저녁 끼니를 반으로 줄여 돈을 모았으며, 부산 기생들은 월 30전씩 매월 납부하겠다는 동맹을 맺었다. 시장상인, 걸인, 장애인은 물론 6세 소년부터 82세 노인까지 푼푼이 아껴모은 돈을 쾌척했다. 이처럼 빚을 진 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국민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채권자 모럴 해저드에 빠진 일제의 간악한 방해공작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외환위기 직후 IMF는 한국의 모럴 해저드를 꼬집었다. 이로 인해 금융시장이 전면 개방됐고 혹독한 구조조정이 잇따랐다. 이는 이전 IMF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아프리카와 남미 빈국들은 늘어만 가는 외채를 감당못해 채무불이행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주빌리 2000(극빈국 외채탕감운동)'은 선진자본국들이 수십년간 그릇된 금융관행을 통해 부당이득을 챙긴 만큼 극빈국의 빚은 탕감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금융기구나 선진국들은 채무자의 모럴 해저드가 우려된다며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 열린 G7 회담에서 일부 채무를 탕감키로 했으나 이는 2조2천억달러에 이르는 빈국 외채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국제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IMF가 지적한 채무자 모럴 해저드를 극복하더라도 채권자의 모럴, 즉 도덕적 책임감이 없으면 결코 왜곡된 금융질서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채를 갚으려면 수출 증대를 통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현상황에서는 악성외채나 투기자본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할 수 없다. 투기자본이 들어와 경기를 잔뜩 부풀려 놓은 뒤 썰물처럼 빠져나갈 경우 피땀으로 수십년간 일궈놓은 경제발전이 순식간에 빚더미로 전락하고 만다. 건전한 외채 사이클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구라운드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는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히 빌린 돈을 갚자는 운동이 아니다. 건전한 외채는 갚되 불건전한 외채는 과감히 탕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투기자본의 전횡을 눈감아 준 국제금융 관행을 바꾸자는 혁신적 논리의 산물이다. 이는 결국 건전하게 외채를 빌려 그것을 건전한 방법으로 사용한 뒤 이를 갚아나가는 '건전한 외채질서(SIDO ; Sound International Debt Order)'를 수립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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