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국제연대의 필요성

97년 5월 프랑스 자동차회사인 르노는 80년대초 벨기에 빌보르도 지역에 설립했던 현지공장을 폐쇄하고 3천여명을 감원키로 결정했다. 90년대 공산주의 몰락 이후 인건비가 싼 동유럽이 다국적 생산기지로 급부상, 벨기에 공장은 퇴출대상이 된 것이다. 빌보르도 지역 근로자들은 시위를 벌이는 등 투쟁에 나섰고 벨기에와 프랑스 정부도 르노측에 공장 철수를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르노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벨기에 근로자들은 일부 관리직 채용과 위로금 지급을 조건으로 공장 철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80년대초 미국과 영국에서 출발, 전세계로 확대되는 신자유주의(또는 세계화)는 '전면적 시장경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상품, 자본, 노동 등 국가간 시장경쟁의 모든 요소에서 자유 경쟁을 하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세계 경제가 다시 활성화될 수 있다는 논리다. 이같은 '교리'에 따르면 벨기에는 동유럽에 뒤처지는 노동조건 탓에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것이다. 벨기에 근로자들이 임금을 절반으로 깎고 노동시간을 대폭 늘리며 복지혜택 철회를 감수하겠다고 선언했다면 르노도 공장을 철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노동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국가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신자유주의의 기수임을 자처하는 미국 역시 국가경쟁력 향상이란 명제 아래 국민경제가 위협당하는 모순된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내 노동력 조사업체인 '챌린저, 그레이 앤 크리스머스'는 미국 기업들이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45만9천여명을 감원, 10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챌린저 관계자는 "기업들이 이윤추구를 위한 최선책으로 실적이 저조한 생산라인 또는 부서 인원을 줄이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민간연구기관인 '정책연구소(IPS)'와 시민운동단체인 '공정경제연합(UFE)'은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보수와 근로자 평균임금간 격차가 지난 80년 42배에서 98년 419배로 10배 가량 벌어졌다고 밝혔다. 건국이후 최고의 경제 활황속에서도 국민들은 고용보장이 안되는 계약직, 임시직으로 전락, 개인소득이 줄어들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근로자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이 이룩한 미국 경제가 자신의 목을 노리는 칼날로 변한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심취한 각국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기업활동이 유리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 무역장벽 해제 등 경쟁력 확보에 골몰하고 있다. 이는 임금저하, 고용불안, 복지정책 철회 등 국민 생활수준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가 정책은 국민 복지와 안전에 앞서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쪽으로 바뀌었다.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은 '밑바닥을 향한 경주'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같은 상황에 대한 저항이나 개선 노력이 결코 개별 국가내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이다. 대구라운드 한국위원회 관계자는 "한국 정부가 타국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복지정책을 실시하며 자국민을 위한 무역정책을 실시한다면 급속한 외자 유출로 다시 궁지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비정부기구(NGO)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의 국제적 연대만이 모순된 구조를 깨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 국제연대를 추구하는 여러 사회단체와 비정부기구들이 국제금융 및 무역체제 개편, IMF 개혁, 투기자본 규제방안 마련등을 주장하며 새로운 국제규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내에도 경실련 등 다수 시민단체들이 국제경제질서 개편을 새로운 의제로 삼고 다국적기업, 무역규범 등을 연구하며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10월6일부터 대구에서 개최되는 '대구라운드 세계대회'는 이같은 국내외 시민사회의 역량을 한데 모아 시너지효과를 얻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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