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이 넘치면 사랑에 곰팡이가 핀다

한국인은 식민치하에서 고생하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느라고 함께 울고 웃는 가운데 인간애(사랑) 이상의 동지적 정감을 키우게 됐다. 그래서 정 때문에 산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유행가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도 그 가락이 인간내면의 정감을 긁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정감을 혼동하여 정감을 사랑인양 이야기하는 수까지 생기게 되었다. 어느 재벌이 돈 때문에 모자간에 법정소송을 제기하며 싸운 것도 치부과정에서 생긴 깊은 정감을 다스리지 못해 일어난 불행이다. 민주화운동 당시 찰떡같던 김영삼-김대중이 등지고 있는 것도 동지적 정감이 깊었던 나머지, 이해가 상반되자 원수 같은 감정에 빠진 추한 모습이다. 그와 같이 정감이 사랑을 잃으면 추해진다.

오늘날 지역감정의 문제, 종친회의 문제, 동창회의 문제 같은 것이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는 것도 보편적 인간애를 제치고 감정적 정감이 넘친 데서 온 부작용인 것이다. 호남사람이 호남을 사랑하고, 영남사람이 영남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마는 사랑이 아니라 끼리 끼리의 감정으로 자기 고향과 종친과 동창을 두둔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런 끼리 사이의 감정은 멀어지기 시작하면 다른 남만 못하게 원수처럼 된다. 이승만과 박용만이 그랬고, 박정희와 김재규가, 윤보선과 장면이, 전두환과 노태우가 그랬다. 패거리 정치꾼이나 깡패기질이 많을수록 정감이 깊은 관계를 좋아하고 그것을 '의리'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한 독립운동가와 참다운 민주화운동자는 운동 기간에도 정감 조절에 적지 않은 신경을 썼다. 백범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던 1945년의 이야기다. 충칭(重慶)에서 아들 인(仁)이 폐렴에 걸렸을 때 며느리 안여사가 시아버지에게 페니실린을 구해 달라고 간청을 했으나 다른 젊은이가 죽어갈 때 구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백범은 며느리를 달래며 구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 유망하던 아들은 죽고 말았다. 심산 김창숙이 1925년에 독립군 기지개척의 자금을 조달하려고 국내에 잠입했을 때, 마침 스승 곽종석의 문집 간행을 위하여 자금을 모아둔 것이 있어서 그의 출자를 요구하니 동문들이 반대하여 차압하다시피 갹출하였다. 그래서 문집 간행은 유산되었다. 그때 백범이 자정(子情)에 빠지거나 심산이 동문의 정을 누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자금을 출자하지도 않았겠지만 독립운동에 곰팡이가 피고 말았을 것이다. 무정부주의자 유림(柳林)은 생전에 아들 유원식이 앞에 서지를 못하게 했다. 애비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아들은 일본군 장교로 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비를 따라 독립군은 되지 못할지언정 토벌하는 일본군에 있었으니 앞에 서지도 못하게 했다. 그것이 진정한 부자간의 사랑이다. 그와 같이 진정한 사랑은 착하고 올바른 길을 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승만과 이강석, 김일성과 김정일, 박정희와 박지만, 김영삼과 김현철의 관계를 보면서 자식에게 엄격했던 김구와 유림을 생각할 때가 많다. 가족주의가 우선했던 했날에는 사랑이 살아 있어 가족간에도 진정한 사랑이 유지되었는데 가족주의가 퇴색한 지금은 사랑은 상실하고 정감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부자나 모녀나 내외 공동으로 비밀계좌를 만들고, 증권을 조작하고, 옷로비를 일으키고, 거액수뢰를 마다않다가 부자가 함께, 내외가 함께 감옥을 정답게 오가고 있다. 사사로운 정을 공직에 남용한 모습이다. 공직자들에게 부탁컨대 정과 사랑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가려서 처신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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