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에도 '판도라의 상자'가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 음악 시대에 이르러서도 작곡가들이 절대 뚜껑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악마의 형상'이었다.
음악가들이라고 어찌 악마의 달콤한 유혹 앞에 꿋꿋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그림자처럼 따르는 악하고 추한 것들의 이미지, 그리고 두 진영간의 투쟁을 거쳐 변증법적으로 통일되는, 보다 완성도 높은 '선'의 미학은 음악 속에서 생각만큼 쉽사리 형상화되지 못했다.
악마를 봉인(封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흐(1714~1788)였다. 바흐의 신성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 수학적으로 빈틈없는 푸가와 칸타타의 장엄미는 광포하고 사악한 악의 기운이 스며드는 걸 용납치 않았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한 바흐는 악마에게 수갑을 채운 뒤 가둬 버렸다.
그러나 음악계에도 프로메테우스가 있었으니 바로 예측불허의 천재, 모차르트(1756~1791)였다. 깔깔거리며 바흐에게서 열쇠를 훔친 그는 죽은 영혼들을 무대 위에 풀어 놓았다.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죽은 기사장의 유령이 나타나 희대의 바람둥이를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본 당시 관객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리라. 모차르트는 오페라 '마적(魔笛)'에서도 복수심에 불타는 '어둠의 여왕'을 등장시켜 본격적인 악의 등장을 예고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장난에 대한 형벌이었을까? 1791년 여름, 음산한 분위기의 잿빛 망토로 온몸을 휘감은 깡마른 사내(영락없는 악마의 이미지다)가 찾아와 죽은이에게 바치는 진혼곡을 써달라고 부탁했고, 그해 겨울 결국 모차르트가 요절하고 말았다는 일화는 한편 의미심장하다.
바흐 이후에도 서양음악의 정신적 지주였던 베토벤(1770~1827)의 기세에 눌려 잠시 머뭇거리던 악마들은 베토벤이 죽은 1827년 이후, '낭만주의'라는 바람을 타고 본격적으로 무대에 난입했다. 그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은 슈베르트(1797~1828). 가곡 '마왕'에 등장한 악마는 그동안 만물의 영장으로 행세해 왔던 인간을 비참하게 굴복시키고 만다. 아들의 목숨을 뺏기지 않기 위해 도망치는 아버지의 처절한 모습이 바로 인간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낭만주의의 모태였던 것이다.
베버(1786~1826·독일)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는 '자미엘'이란 악마가 등장한다. 어둠 속에 숨어 희미한 윤곽만을 보여줬던 악마는 이제 지능과 교활함을 갖춘 존재로 진화했다. 자미엘은 백발백중의 마탄(魔彈)으로 사냥꾼을 유혹하며 결국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다. 악마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사냥꾼은 또 한명의 희생양을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악마에게서 마탄을 받은 작곡가도 있다. 자신을 성직자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채 바이올린에 미쳐 있었던 타르티니(1692~1770·이탈리아)는 21세 되던 해 꿈 속에서 바이올린의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악마와 만났다고 한다. 비록 꿈에서 였지만 혼을 팔겠다는 약속을 하고 악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깨어난 그가 악보에 옮겨 적은 것이 바로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7-1, '악마의 트릴'이란 제목이 붙어 있는 곡이다.
지금은 좀처럼 공연되지 않는 곡이지만 마르슈너(1795~1861·독일)의 작품 중에 '흡혈귀'라는 오페라가 있다. 마녀와 요괴가 달빛 아래서 무시무시한 합창으로 대악마를 불러내는 첫 장면부터, '처녀를 범하고 죽여야 한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라며 노래부르는 흡혈귀의 아리아에 이르기까지 오페라는 섬뜩하고 생생한 악령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현대음악의 선구자격인 펜데레츠키도 '루돈의 악마'라는 오페라를 남겼다. 수녀와 사제를 타락시키고 엑소시스트와 대결하는 이 악마는 웬만한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악마의 모습 이상이다.
금세기 들어 인간의 내재적 욕망에 주목하는 '표현주의'가 중요한 예술사조의 하나로 등장하면서 아니, 인간의 형상을 하고도 악마보다 더한 악마성을 가진 전쟁광들의 살륙을 빈번히 목격하게 되면서 이제 악마는 당당히 예술작품의 중요 배역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申靑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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