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노진철(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약 20년전쯤 독일로 유학갔을 때 나는 놀라운 현실 앞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배운 지식에 따른다면 서구사회는 현대화의 결과로 마을공동체가 붕괴되고 사람들은 모두 다 제 이익만 챙기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관계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서구사회는 내가 잘못 알고 있음을 현실을 통해 강변하고 있었다. 그 사회는 우리보다 서구적이지도 않았으며, 현대화되지도 않았다.

독일의 어느 마을을 가든 그 마을의 오랜 역사가 현재의 삶 속에 살아있었고,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마을 한 가운데는 으레 고색창연한 성당이나 시청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앞의 넓은 공터에는 주말시장이나 작은 거리음악회가 항시 열려서 주민들로 붐볐다. 마을마다 독특한 마을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동네 모퉁이 술집에는 저녁마다 마을사람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곤 하였다.

내가 살던 빌레펠트라는 도시는 독일에선 비교적 큰 도시에 속했지만 고층빌딩도 없었고 고층아파트도 없었다.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중심가는 4, 5백년은 족히 되는 건물로 들어차 있었고, 차도는 옛날 돌로 깔아 만든 그대로 였으며, 사람들은 마을축제에 함께 어울려 놀 줄 알았다.

10년후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그 거리, 그 골목, 그 상가에 그 사람들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서 고향처럼 반겨주던 도시다. 그런데도 인근 도시에서 온 학생들은 그 도시가 삭막하고 사람들이 정이 없다고 비난하였다. 실용성 위주의 상용건물이 너무 많고 나누는 인사말에 정이 묻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떠한가? 반만년의 역사를 입버릇처럼 뇌면서도 어디 한 군데 전통의 흔적이라곤 남아있지 않다. 전통이란 우리에겐 빨리 벗어버려야 할 낡은 것이고 마을풍습은 촌스러운 것이다. 건물은 모두 양옥이나 아파트로 개조되고 동네사람들은 자꾸 마을을 뜬다. 마을의 공터는 사라진지 오래이며 골목은 자동차로 빼곡이 들어차서 아이들이 뛰어놀 장소도 없다. 담장은 남이 들여다보지 못하게 높이 둘러쳐져 있고, 관 주도로 열린 마을행사에서 동원된 사람들은 신명나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쁘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른다.

서구 어느 도시나 농촌도 우리만큼 인간관계가 삭막하지 않으며, 마을공동체가 붕괴되어 있지도 않다. 우리 사회는 아주 짧은 시간에 전통을 내던져 버리고 서구보다 더 서구적이고 더 현대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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