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최현배(崔鉉培)선생이 문교부 편수국장 재직시에 근무중에는 국장 책상에 놓여 있는 펜으로 글을 썼는데 사사로운 편지를 쓸 때는 자신의 만년필을 사용했다. 공사를 구별하는 것이 생활에 배어있던 때였으므로 남들도 그것을 별나게 보지 않았다.
역시 한글학자인 이윤재(李允宰)선생은 서울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일대에는 가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구한말부터 남산 북쪽 기슭으로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고 조선총독부도 1926년까지는 거기(제일터널 근방)에 있어서 지금의 퇴계로와 충무로 일대는 일본인들의 상가 또는 주거지가 되었다. 그때 일본인들은 진고개를 새로 개발하여 '본정(本町)'이라 불렀으니 이윤재선생은 일본의 '침략본정'이라 하여 거기는 가지를 않았다.
그런데 딱한 일이 생겨났다. 자기의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기업가가 있었는데 그가 아들 결혼식을 본정 2정목(충무로 2가)에 있던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에서 가진다고 기별이 오지를 않았는가? 생각다 못해 이윤재선생은 결혼식 시작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진고개 입구에 서서 멀리 바라보며 결혼식을 축하하고 부조금을 따로 전하였다. 그렇게 고집스런 이윤재선생이었으므로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때 함흥감옥에 갇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안동에 가면 1910년에 자결 순국한 이만도(李晩燾)선생의 미담이 전해 온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단식 자결하였다. 대한제국이 망했을때 자결 순국자 가운데 음독 자결자가 가장 많았고, 다음에 단식 자결자가 많았는데 단식할 때는 모두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만도선생은 단식을 하면서도 가족은 물론, 문인 제자와 이웃 마을의 친구나 문병객까지 모두 만났다. 제자에게는 양심을, 며느리에게는 부덕을, 손자에게는 의리를 가르치며 단식하였다. 죽으면서 인간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제자에는 변절자가 거의 없고, 그의 아들.손자는 모두 독립운동에 몸바쳤다. 그의 며느리는 고문으로 실명당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고집의 미담을 남겼다. 더없이 아름다운 고집들이 아닌가.
화가들이 난초를 그릴 때 흙을 그리지 않는 것을 놓고 '寫蘭不寫土'라 하여 동양에서는 고집의 멋을 대변한다고 해서 좋아했다. 송(宋)나라 선비들이 여진(金나라) 오랑캐에게 서울 개봉을 빼앗기고 쫓겨 항주에 가서 있을 때 고향의 난초를 그리되 오랑캐에게 짓밟혀 더럽혀진 흙은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고집의 이야긴가?
이제는 그런 고집이 없어졌다. 멋다운 멋도 없어지고 있다. 쓰레기 인생들이 멋을 이야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고집불통 패가망신이라고 핑계를 달면서 말이다. 세속적인 이해를 따질때 고집을 부리면 패가망신한다. 그러나 이해득실에 팔려 양심과 정의의 고집을 잃으면 쓰레기 인생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해에 밝은 기업가나 정치가에 쓰레기 인생이 많은 것이다. 돈으로 양심을 포장하고 권력으로 정의를 위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옛날에는 선비들이 비평을 하고 언로가 열려 있어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얼마전 군사정권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하여 학자와 언론이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지금은 언로는 돈에 막혔고 학자의 본산인 대학은 기능주의에 빠져 선비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것이 신자유주의란다. 흙없는 난초의 그림은 술집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있다. 선인들이 남겨준 고집의 멋을 살릴 길은 정말 없다는 말인가?
국민대 명예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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