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테마가 있는 음악여행-(5)가을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고은의 시 '가을편지'중)'

가을에, 시는 노래가 된다. 생동하는 봄, 여름의 정열, 겨울의 냉혹함. 한가지 이미지로 고착된 다른 계절에 비해 '결실의 풍요', '상실의 빈곤'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이 계절의 역설은 연약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옥죄어 흔든다. 금빛 출렁이는 들판 옆으로 길게 난, 퇴색한 낙엽이 뒹구는 길을 옷깃 세우고 걷노라면 누구나 '외로운 여자'가 되는 것이다.

가을을 테마로 한 음악도 다양하다. 따스하고 목가적인 서정이 넘치는 전원음악 '파스토랄'이 있고,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못하는 비가(悲歌) '엘레지', 또는 애잔한 녹턴이나 로망스도 가을음악의 얼굴들이다.

투쟁과 극복, 승리로 점철된 '운명'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베토벤이 자신의 견고한 이미지를 유화시킬 수 있는 것도 '파스토랄'이란 이름이 붙은 두개의 명곡, 교향곡 제6번 '전원'과 피아노 소나타 제15번 '전원'을 남겼기 때문이다. 전원교향곡은 1802년 청력을 잃어 자괴감에 빠진 베토벤이 유서를 쓰며 머물렀던 유명한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를 6년 뒤 다시 방문해 쓴 작품. 새소리·물소리·바람소리를 아름답게 묘사한 전반부에 이어 광포하게 몰아치는 폭풍우의 시련,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의 숭고한 감사로 마무리되는 걸작이다.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 가을에 어울릴 만한 서정적인 것들 대부분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베토벤이 여자 피아노 제자들에게 헌정했던 소나타 작품들. 작품 7(케글레빅스 백작부인에게 헌정), 작품 78(브룬스비크 백작부인에게 헌정), 작품 101(도로테아 에르트만 남작 부인에게 헌정) 등도 이즈음 들어볼만 하다.

계절 음악으로 가장 친숙한 것은 비발디의 '사계'가 아닐까. '사계'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작품도 아니고(총 12곡으로 구성된 바이올린 협주곡집 작품 8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중 처음 4곡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계'다), 작곡가 자신이 '사계'라는 표제를 붙인 것도 아니지만(비발디는 단지 '봄'·'여름'·'가을'·'겨울'을 작곡했을 뿐이다), 비발디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남아있다. 사실 비발디는 협주곡만도 무려 450곡이나 남겼지만 후배 작곡가들로부터 '똑같은 노래를 번호만 바꿔 100곡씩이나 써갈긴 작곡가'라는 비난을 받았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비슷한 것들이 많은 까닭에 '사계' 이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레퍼토리가 없다.

비발디는 '사계'의 각 악장마다 직접 음악의 내용을 설명한 소네트(14행 시)를 달아놓았고 '가을'은 수확을 기뻐하며 술에 취한 사람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춤과 노래가 끝난 뒤 달콤한 잠이 깃드는 멋진 휴식을 그리고 있다.

회화적 소품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곡가 샤브리에의 '전원 모음곡'은 깔끔한 수채화에서 느껴지는 원색의 색채미를 간직한 작품이다. 평생 자연을 소재로 한 음악에 주력해 온 아일랜드 출신 작곡가 아놀드 백스의 '11월의 나무숲', '행복한 숲' 등도 눈부신 색채미가 환상적으로 표현된 더할나위 없는 가을음악. 반면 프레데릭 델리어스의 '북쪽 시골의 소묘' 중 '가을'은 흑백사진의 앵글에 잡힌 듯 무채색의 소박하고 담담한 가을 느낌을 준다. 아서 블리스의 메조 소프라노·합창·플루트·팀파니·현을 위한 '전원곡'도 '흰 양떼로 뒤덮여진'이란 부제를 가지고 있는 감미로운 가을 음악.

프로코피예프의 관현악 소품 '가을의 소묘'(작품8)에 이르면 가을은 빛과 색을 잃고 더없이 스산해진다. 러시아의 짧은 가을은 임박한 겨울의 서곡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계절과 관련된 표제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포레의 로망스(작품 69)나 브람스의 현악6중주 제1번(작품18), 쇼팽이 남긴 19곡의 녹턴 시리즈도 쓸쓸한 가을밤에 어울리는 노래들. 거칠게 폭염에 항거하던 매미 소리 대신 어느새 귀뚜라미의 노래가 깔리는 계절. 아무래도 가을엔 편지를 써야할 것 같다.

申靑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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