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윌리엄 깁슨이 지난 84년 발표한 소설'뉴로맨서(Neuromancer)'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지하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미래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의 두뇌와 전세계를 덮는 전산망이 연결됨으로써 인간과 기계의 섹스, 인간과 기계의 결혼, 인간두뇌의 개조 등 충격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해커들은 정보를 혼란시켜 세계를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위기상황에 빠뜨리는 그런 내용이다.깁슨의 상상력에 의해 사이버스페이스가 출현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책 속의 미래세계는 한낱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로서 나타나고 있다.
전세계를 거미줄처럼 잇는 정보의 아우토반. 인간의 상상력과 하이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만들어낸 인터넷이 어느새 우리들의 일상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다.
컴퓨터와 모뎀만 있으면 누구나, 숨쉬는 것 만큼이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사이버스페이스. 사이버백화점과 사이버벼룩시장에서 쇼핑하고, 사이버대학에서 강의 듣고, 세계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맘대로 들락거리며 관람하며, 사이버여행사에 항공권 예약을 하고, 사이버서점에 신간을 주문한다.
심심하면 얼굴모르는 친구들을 수시로 불러내 데이트를 즐긴다. 상대방의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비듬가루에 실망할 필요도 없고, 더치페이 걱정을 안해도 된다. 사이버섹스는? 서로의 분홍빛 메시지가 부딪치면 언제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물론 비아그라는 필요없다. 신체접촉은 없으니까. 컴퓨터와 자판을 통한 대화가 전부이지만 화면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실제와 똑 같은 흥분을 느낀다.
인터넷의 등장에 따른 사이버문화가 90년대 삶의 지축을 흔들고 있다. 20세기말의 공기를 호흡하는 지구상의 남녀노소가 가공할만한 사이버문화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사이버문화는 과연 21세기를 주도할 문화양식이 될 것인가?
지난해 9월,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르윈스키양과의 섹스 스캔들 보고서는 인터넷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CNN 사이트에는 분당 최고 34만건, MSNBC 뉴스사이트에도 하루 113만건이 접속되는 사건(?)이 생겼다. 미국내 인터넷 이용자의 22%, 미국 성인인구 12%에 해당하는 2천만명이 인터넷을 통해 이 보고서를 열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컴퓨터가 현대인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상공간의 사이버문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별세계가 아니라 이미 현실문화의 한 부분으로 정착됐고, 그 영향력은 갈수록 막강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컴퓨터 앞에 앉아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한다. 인터넷 속에만 들어가면 교통체증 없이도 어디든 갈 수 있고, 숨막히는 매연도 없으며, 신나고 흥미진진한 일들이 무진장으로 펼쳐진다.
21세기는 문화예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관계전문가들은 전통문화예술과 사이버문화가 각각 그나름의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이며, 특히 사이버문화가 득세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한 21세기는 '순간적인 것', '사건', '이미지' 등을 뜻하는, '시뮬라르크의 시대'가 될 것이라 한다. 첨단 하이테크놀로지와 문화예술의 결혼으로 종래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충격이 속속 우리의 일상에 밀려들 전망이다.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세계문명사를 다시 쓰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미 영상분야에선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다. 애니메이션 왕국 월트 디즈니가 최근 창조해낸'디지털 배우'몬티. 이 가상배우는 컴퓨터 합성 목소리로 정확하게 대사를 말하고 눈과 입의 표정연기는 실제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다. 디지털 배우와 살아있는 배우가 함께 연기하는 시대가 시작됐음을 말해준다.
국내에서도 고형석 서울대 교수(전기공학부)가 이끄는 휴먼 애니메이션 연구팀이 죽은 배우를 필름에서 뽑아내 되살리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0년후 쯤이면 새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제임스 딘이나 마릴린 먼로를 보게 될 지 모른다. 컴퓨터의 자동반복기능을 응용, 어떤 음악이든 집안에 앉아서 제작할 수도 있다. 일명 하우스 뮤직이라 불리는 사이버 음악은 이미 힙합, 테크노뮤직, 레이브뮤직 등의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쌍방향의 의사소통을 의미하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는 21세기 문화예술의 중요한 지향점이다. 관객이 작품에 뛰어들어 내용을 구성해 가는 '열린 문화'. 사이버문학은 소설 중간중간에 갈래길을 만들어 독자가 줄거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외국의 경우 작가는 인터넷상에 웹사이트를 만들어 기획만 하고 독자들이 작품을 투고하는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문화평론가 이유남씨는 "21세기엔 한 사람의 작가가 작품을 독점적으로 만드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최근 한국민족예술총연합이 주최한 사이버 시대 문화예술을 주제로한 포럼은 '예술은 진지한 것'이라는 전통 관념 때문에 사이버문화를 더 이상 논외로 할 수 없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됐다.
주제발표자인 김성기 한일장신대 교수('현대사상' 주간)는 "사이버문화가 21세기의 주도적 문화양식이 될 경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가 최대의 고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하튼 21세기엔 이른바 스머그족(SMUG族: 똑똑한 지식노동자로 탄력적인 사고를 갖추고 사회적 상승을 지향하는 지구촌형 인간. 밀레니엄 키드의 우생족)이 신인류로서 각광받을 전망이다. '정보소유자 권력'이라는 현대의 금언처럼 정보와 데이터로 분해된 지식을 찾아내고 꿰맞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연계의 질량불변 법칙처럼 21세기 문화혁명을 예고하는 사이버문화도 지나친 기계와의 밀착으로 자칫 인간 소외, 탈인간화 등의 어두운 심연을 함께 지니고 있다. 사이버문화는 어쩌면 21세기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도 모른다.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全敬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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