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환 사상전향 반성문 요지

저는 중고교 때부터 정부에 비판적 의식을 가져 대학에 들어와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됐고 역사와 사회현상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린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려 의식화학습을 받고 교육을 시키면서 시위에 적극 나서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제가 4학년이던 85년부터 기존 학생운동이 민족자주나 반미문제에 소극적인점에 불만을 갖고 '반미운동'을 도입했고 이는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해 순식간에 학생운동의 대세로 됐습니다. 반미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고자 관변단체에서 나온 북한 관련자료를 구해봤고 '주체사상'은 민족주체의식과 인본주의를 강조하던 우리에게 아주 매력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강철서신'등의 글을 써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주사파'라는 운동권 최대세력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후 체포돼 2년 정도 형을 살고 나왔지만 생각이 바뀌지 않아 89년 2월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했고 남파공작원에 포섭돼 북과 연계를 맺고 91년 밀입북, 김일성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밀입북했을 때 보니 북한의 경제실상이 예상보다 훨씬 열악했고 당 간부들은 주민들에게 고압적인 자세였으며 김일성의 사고는 박제화돼 있어 많이 실망했지만 주체사상을 무기로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북과 연계를 갖고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엔 도움될 게 없었고 유일한 도움이 통일운동이었지만 북은 오히려 일관되게 방해만 했습니다.93년 대중과 유리된 통일운동의 걸림돌이 '범민련'이라고 보고 이를 해체해 새로운 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북한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북은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방해하고 나섰고 남한 운동권은 분열상황에 빠지게 됐습니다.

92년 넘어온 강철환, 안혁 등 탈북자들의 증언은 북의 비참한 실상을 깨우쳐 줬습니다. 증언이 꾸며졌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었고 그 이후에도 거짓말임이 드러나지 않아 종합적으로 볼때 이들 증언이 대체로 진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94~95년에는 북한체제에 비판적 인식을 굳히게 됐고 96년엔 이한영 증언이 나오면서 김일성-김정일 정권이 극단적으로 부도덕한 정권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특권과 사치생활을 즐기고 주민들의 사소한 잘못을 가차없이 처벌하면서 자기들은 첩을 몇명씩 두고 부도덕한 짓을 서슴지 않았으며 주체사상은 지배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고 인민의 자주성을 가장 심하게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97년2월 황장엽 비서가 망명하고 식량난으로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 김정일 정권은 남북한 민중의 적으로 타도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민혁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해산결정을 했습니다.

지금은 사상을 완전히 전환하고 북한 민주화에 전념하고 있지만 과거의 잘못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첫째 운동권 전반에 친북적인 분위기를 확산시켰다는 점입니다. 둘째 북한의 대남전략에 말려들었고 이는 무책임하고 분별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셋째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남한 및 국제사회의 관심이 늦어지도록 하는데 한몫했습니다.

북한주민들은 극한상황의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북한동포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며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한의 인권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을 민주화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바치고 싶습니다. 과거 저를 믿고 따르며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 새로운 시대흐름에 동참할 것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99년10월4일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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