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히 가난하고 혼란스럽던 지난 시절, 담당자에게 화랑담배 한 갑이라도 전달하지 않고는 동사무소에서 거류증 한 장을 떼는데도 힘이 들만큼 온 사회가 부패한 때가 있었다. 그동안 정권이 몇번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종류의 폐단은 훨씬 적어졌다. 그러나 몇번의 군사정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서도 계속 드러나는 규모 큰 부패 사례, 허다한 뇌물사건, 범죄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심각하게 부패했고 병들어 있음을 드러낸다.
부패는 가장 무서운 사회적 병이며 종기이다. 이 종기를 근치하지 않고는 우리나라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부패는 없어져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사회적 계층, 사회적 위치, 경제적 힘과는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부패에 철저한 사정의 칼을 대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민의 정부가 최근에 보여준 대기업들을 비롯한 여러 계층의 고급관리들의 비리수사, 적발, 사정에 대한 삼엄한 태도는 국민의 큰 호응과 적극적인 격려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국가적 사정의 동기는 오로지 국가의 복지에 있어야 하고, 사정의 방법은 철저한 형평성의 원칙에 기반해야 하며, 사정의 칼자루를 쥔 권력자의 권력행사는 법적 정당성을 갖추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그 동기가 권력자의 개인적 및 집단의 정치적 이해에 있고, 그 방법이 표적적이라면 문제는 크다. 법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할 사정의 논리가 조금이라도 정치적으로 권력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는 안된다. 부정과 부패를 그 뿌리로부터 없애자면, 사정의 칼날은 모든 개인, 모든 단체, 모든 기업에 다같이 공평하게 돌려져야 하고, 만약 모든 국민이 그러한 사정의 대상이라면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정을 공평하게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역대 정권을 통해서 지금까지는 한번도 그렇지 못했다.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지금 사정은 달라져야 한다. 중앙일보 홍사장의 구속이나 한진그룹 탈세를 둘러싼 정부와 중앙일보, 여당과 야당간의 최근의 시비를 지켜보면서 권력 남용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만일 홍사장이나 한진그룹이 천문학적 탈세를 했다면 그들은 마땅히 국가의 삼엄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며, 그들 뿐 아니라 모든 탈세자는 그들의 경제적 공로, 정부와 정당과의 관계와는 별도로 똑같은 법적 틀에서 엄격하고 투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런 점을 시비할 이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홍사장의 체포와 한진그룹의 탈세사정의 저의가 일부 여론들이 주장하는 대로 권력에 의한 표적적 언론탄압이나 '재벌 길들이기'의 방편이라면 민주주의와 국민의 정부를 자처하는 현 정부의 문제는 심각하다.
국가를 모독했다면 몰라도 만에 하나 "국가 원수인 어른의 마음이 불편하셨다 "는 이유로 대통령의'명당 가족묘지'에 대한 한 신문의 기사를 쓰지 못하도록 국가권력이 압력을 넣어 직접 간섭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국민의 정권하의 민주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언론탄압의 예로 들 수 있으며, 권위주의적 권력 남용의 우스운 사례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개인은 물론 국가를 치욕스럽게 만들 것임을 알면서도 대통령인 클린턴의 성추문사건이 언론에 의해서 크게 보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특별재판이 전세계적으로 공개된 가운데 진행됐던 미국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분명하다.
개인으로서의 김대중은 곧 한국의 국가 공인으로서의 대통령이 아니며, 인간 김대중의 권위는 곧 한국 대통령의 권력이 아니다. 21세기를 코 앞에 둔 지금의 한국은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절대 군주 루이 14세가 살았던 17세기 프랑스와는 사뭇 다르다. 권력은 이성의 논리를 상실하고 오만, 권위주의 그리고 부패로 통할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권력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고질적인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포항공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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