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화강.천지 60%가 우리땅

백두산 일대의 북한-중국 간 국경선이 어떻게 획정돼 있는지에 관해서는 단지 국경선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 동안 정확히 파악된 것이 없다.

그러나 지난 83년부터 백두산 일대 국경선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 든 '백두문화연구소'대표 이형석(李炯石.가천문화재단.62) 박사가 중국에서 확인한 '중.조 변계조약(邊界條約)'은 중국과 북한 양측이 이미 1962년 10월 12일자로 백두산 일대의 국경선 확정을 마무리 지었음을 보여준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와 중국 간 국경선 확정문제는 이미 알려진 대로 오래 전부터 양측이 첨예하게 맞부딪혀 온 민감한 사안이었다.

1721년(조선 숙종 38년) 5월 군관 이의복(李義復).조태상(趙台相) 등과 청나라 오라(현 지린.吉林) 총관 목극등(穆克登) 일행 수백명이 현지를 답사하고 백두산 동남쪽 약 4㎞ 지점(해발 2천200m)에 우리나라와 청국을 가르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양국 간 국경선을 처음으로 획정한 것이 바로 백두산 정계비이다.

이 정계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西爲鴨綠 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토문강'이 두만강을 지칭하는지 현재 중국 영토 안의 '토문강'을 지칭하는지는 당시에도 논란거리였다.

이 때문에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의 제의로 양측대표가 회동, 정계비 문제를 담판했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우리측은 두만강의 상류 홍토수(紅土水)를 국경선으로 주장한 반면 중국측은 홍단수(紅丹水).석을수(石乙水)를 주장했다.

일제가 국권을 빼앗아 간 뒤인 1909년 9월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선양.瀋陽-다롄.大連)을 보장받은 대가로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청나라측 해석을 그대로 인정,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은 제 1조에 "청.일 양국정부는 두만강을 한.청 경계로 상호성명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경계선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때부터 50년대 말까지 한.중 국경선은 두만강 상류인 석을수로 확정되고 말았다.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상류이며 따라서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우리측 주장은 철저히 무시됐다.

이번에 내용이 확인된 '조.중 변계조약'은 홍토수를 두만강의 원류로 삼아 국경선을 확정했다. 고종 때 주장했던 '홍토수 국경선' 주장이 77년만에 되살아 난 셈이다.

중국이 북측 주장에 선선히 동조한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시 조선족자치주 주덕해 주장이 "국토를 팔아 먹었다"는 비난을 받고 하방(下放.지방으로 내쫓김)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중국 안에서도 국경선 협상 결과에 불만을 가진 시각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조.중 변계조약'으로 1721년에 세웠던 백두산 정계비는 그 의미가 사라지고 정계비 터도 우리 국토 안에 위치하게 됐다. 또 송화강의 최상류 지역과 백두산 천지의 5분의 3이 우리 국토에 편입됐고 1909년 간도협약 경우보다 우리 국토의 면적이 280㎢정도 확장됐다고 이 박사는 설명했다. 확장된 면적은 서울시 면적의 45% 정도다.

천지 주변의 주요 봉우리 가운데 쌍무지개봉, 향도봉, 삼기봉, 백두봉(장군봉), 단결봉, 제비봉 등이 우리측에 속하게 됐고 옥주봉, 백운봉, 지반봉, 금병봉, 광견일봉, 용문봉, 천해곡봉, 철벽봉, 천장봉, 화개봉은 중국측 영토가 됐다. 양국 국경을 이루는 봉우리는 제운봉, 와호봉, 관모봉이기 때문에 천지 면적의 60%가 우리 영토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 조약으로 과거 청.일 간에 체결했던 간도협약보다 우리 국토 면적이 더 확장됐다고 하지만 통일정부가 들어서면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를 지칭하는 것인지 두만강인지의 해석을 놓고 국경선 문제가 다시 대두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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