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있었던 시골 여행길에서 차창 밖을 무심히 스쳐가는 허수아비를 보았다.
그런데 그 남루한 차림새의 허수아비는 나락을 모조리 베어낸 빈 논바닥 가운데 찢겨진 옷자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저 혼자 외롭게 서 있었다. 왜 나락을 베어내면서 허수아비도 같이 철거하지 않았을까. 나는 현장을 지난 지 한참만에야 그것을 그대로 세워둔 농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꾸부정한 모습으로 바람에 시달림을 받으며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허수아비의 모양새에서 느끼는 허탈하고 서글픈 이미지는 바로 그 해의 농사가 흡족하게 마무리되지 못했던 농부의 비애를 나타내려는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서툰 솜씨로 어설프게 꾸며놓은 허수아비에게서도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난 다음 처연한 농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도시에서 자랐거나 외국인이었다면, 스산한 허수아비의 모습에서 농부의 마음까지 읽을 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함께 여행을 떠났던 일행이 귀경길에 대전 근교에 있는 소문났다는 보리밥집을 찾았다.
마침 일요일 오후의 그 집 넓은 마당은 축제라도 열린 것 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메뉴는 아무 것도 아닌 도토리묵과 보리밥이었다. 뚬벅뚬벅 잘게 썬 풋나물들과 콩나물과 된장찌개와 보리밥을 큰 양은그릇에 한데 버무려 넣고 밥주걱으로 비벼서 제각기의 숟가락을 양은그릇 속으로 들락거리며 퍼먹는 식사가 진행될 동안 10여명의 일행들은 말 한마디 없을 정도였다. 우리 모두는 오랜만에 시골 외갓집 살평상에 모여앉은 동기간들처럼 이마를 부벼가며 그 아름다운 식사를 끝냈다. 한때는 애옥살이의 상징처럼 여겨왔었던 깡보리밥이 선사한 추억의 식사에서 우리는 우리들끼리 엉키는 정감들이 미세하게 교차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창피하기 그지없이 점심시간에도 도시락을 열 수 없었던 그 보리밥을 먹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다는 것은 보리밥의 식사는 가슴으로 먹는 음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형 할인점에 밀려나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시골의 5일장도 우리들 곁을 떠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강원도 정선에 장이 서는 날은 서울에서 출발하는 정선행 열차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승객들로 들어찬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서는 5일장의 정취를 맛보기 위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두메의 뜸마을에서 몇 됫박의 잡곡과 풋나물과 몇 개의 곶감을 들고나와 골목장을 지키고 앉은 노파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리고 정성스럽게 갈무리한 추억의 먹거리들을 헐값에 사서 배낭에 넣고 돌아오기 위해 그 열차를 탄다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작년에 있었던 북한 여행에서 백두산 아래에 있던 호텔 주방에서 빚어놓았던 백두산 감자를 주재료로한 국수와 전병들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맛깔스런 요리 중의 하나다.
모두가 우리의 땅에서 얻어진 수확으로 정성을 담아 빚은 먹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의 신세대들은 먹는 것에 대하여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실망스럽고 안타깝다. 아무렇게나 먹다가 싫으면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먹는 것이라면 결코 아무렇지 않게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는 것 중에 한가지다. 두 끼만 굶어봐도 그것을 깨닫게 된다. 빈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허수아비의 비애를 되새겨봐야 할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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