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70만 재일동포들은 제각기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며 어김없이 세금을 내고 일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민족 차별은 여전해 많은 동포들이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고 있다.
일본 정부와 각 기관을 상대로 차별과 관련된 각종 법제도의 미비점과 잘못을 가려내 이를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온 사람이 있다.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한민족문제연구소 박병윤(朴炳閏.61)소장. 그는 동포들의 권익옹호를 위한 이론적 뒷받침과 함께 직접 행동으로 뛰고 있다.
오사카에서 재일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츠루하시(鶴橋)시장 부근 경상북도 도민회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그는 각종 논문과 팸플릿등 재일동포와 관련된 자료들을 한 가방이나 안고 나타났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민단의 역사 즉 재일동포들의 권익을 찾기 위한 각종 민단사업들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민단과 조총련의 화합에 일생을 걸고 있다.
"조국의 분단 때문에 민단과 조총련으로 양분됐지만 우리가 하나로 된다면 모든 면에서 재일동포들이 일본인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통일을 위해 '하나가 된 해외동포가 남북통일에 기여한다'는 과제를 화두로 내세우고 동포사회의 화합을 일관되게 주장해 오고 있다.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소작농이었던 그의 부친은 쌀농사를 지어도 쌀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1930년 무작정 도일했다고 한다. 맥주공장에서 막노동일을 하던 부친은 의성 안계가 고향인 동포 처녀를 만나 결혼했고 그는 1938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그후 8세 때 해방을 맞은 그는 고향인 경북 의성으로 돌아와 비안소학교에 다니며 2년 동안 살았다. 그때의 농촌생활을 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오사카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3학년까지 다녔으나 민족문제에 관심이 깊어지면서 문예창작과로 전과해 공부를 계속했다. 고교시절부터 책읽기를 좋아한 자신의 주관적인 진로 선택이었다.
당시 도쿄에는 기성 문인들의 문예동인지 '백엽(白葉)'이 발간되고 있었다. 그는 학생 신분이면서 백엽의 편집을 맡았다.
"이 동인지는 문화활동을 통해서 남북을 하나의 시야로 보는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이러한 움직임이 지금은 크게 무리가 없겠으나 당시에는 위험한 생각이었지요그후 대학원을 나와 부친이 경영하던 부동산회사를 맡아 경영을 시작했으나 업무보다는 민단과 조총련의 화합, 민족문제와 관련된 각종 논문을 쓰고 세미나 발표자로 활동하기에 바빴다. 남북간의 문화교류 추진, 남북불가침 조약 조기체결 등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방안들을 각계에 호소했다.
1970년대에 들어 남쪽은 유신체제, 북쪽은 주체사상체제로 들어가 그러한 제도의 틈사이에 존재하는 재일동포 사회에도 분단의 모순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민단과 조총련 사이에 가교가 없어지고 교육받은 식자층 재일동포들까지도 이데올로기의 틀속에서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70년대 초에는 재일동포 2세들이 발언권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였지요. 당시에 나는 '한반도 통일연구회'를 결성하고 민단과 조총련의 협의기구 설치를 제안했습니다" 재일동포의 화합이 남북통일의 접착제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군대위안부 문제와 전후보상에 있어서도 남북이 공동대처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남북 즉 민단과 조총련이 정주외국인으로서의 권리와 기본적인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분단을 초월해서 협력한다면 이는 민족적 위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민단과 조총련이 공동작업을 추진하는 단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1991년 4월 일본 지바(千葉)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출전하게 되자 양측은 공동환영위원회를 결성했다. 대회 기간 동안 민단과 조총련은 함께 모여 환영과 응원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화합과 협력속에 남북선수들이 모인 '코리아'팀은 여자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세계의 이목이 몰린 가운데 열린 시상식장에서는 일본 NHK교향악단의 반주속에 아리랑이 울려퍼져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1985년에는 일본 전국에서 재일동포들에 대한 지문철폐운동이 일어났다. 범죄인 취급을 당하면서 찍어야 하는 지문은 동포들에 대한 인권침해였다. 민단 중앙본부는 지문제도 철폐위원회를 만들고 실질적으로 운동을 진두지휘하는 사무국장에 그를 영입했다. 위원장은 경북 군위군 출신 재일동포 2세인 김경득 변호사가 맡았다당시 일본 전국에서 1만4천명여명이 지문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20여건의 소송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서류가 접수되기 시작해 재판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는 각지에서 관련 행사를 개최하고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그는 재일동포들의 권익옹호를 위한 많은 글을 발표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 후 재일동포의 지문날인은 없어지게 됐다. 그 결과 정주 외국인에 대한 지문제도까지 완화됐다.
그는 이러한 사업을 계속해오는 동안 이론적 체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개인연구소인 한민족문제연구소를 개설했다. 외국 사례연구와 재일동포의 특수성을 분석하는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각종 국제학술회의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는 재일동포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활동하고 있다. 부모들은 생업에 바빠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그 결과 민족적 아이덴티티는 희박해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대한 한 방안으로 '재일한국장학회'를 발족하고 그는 이사장을 맡아 동포자녀 대학생 20명에게 매달 장학금을 주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일본 이름이 아닌 본명 사용과 장학회 이사들이 진행하는 특강시간에 출석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좌담회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시간에는 민족성과 예절을 배우고 일본 귀화 등에 대한 토론도 한다. 수혜 학생들 가운데는 교수, 변호사, 의사 등 사회 각층의 인재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다시 장학회의 이사가 되고 후배들의 특강을 담당하기도 한다.
"많은 동포들이 재단이사로 참여해 장학기금을 보내줬고 지금까지 총 600여명의 학생들이 장학회를 거쳐 갔는데 한국 역사, 3.1절의 의미 등을 가르칠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는 대다수 동포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일본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한국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귀중한 시간과 공간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성취감 때문이다. 이같은 그의 노력은 이제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는 재일동포 3세 문제와 관련해 더욱 빛나는 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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