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과함께-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붓 한 자루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의 사관(史官). 바른 역사를 남기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은 사초 때문에 김일손 등 수많은 사관들이 죽어갔다. 왜 이들은 목숨과 기록을 맞바꿀 정도로 사초에 집착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박홍갑씨가 쓴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가람기획 펴냄)는 사관의 기원에서부터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가 어떻게 역사로 기록되는지, 그들과 관련된 사건이나 그들이 남긴 사론속에서 어떤 교훈을 찾을 수 있는지를 되짚어본 책이다.

실제 역사에 나타나는 사관의 시초는 중국 주(周)나라때부터. 처음에는 제례때 활과 화살을 세는 간단한 직무를 맡아보다가, 뒤에 천도와 역법을 맡아 자세하게 기록하는 대사(大史)로 발전한다. 본격적으로 역사 기록만을 담당하는 사관은 한(漢) 무제때 태사령으로 임명된 사마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사관은 한 집안에서 대대로 세습하면서 역사를 편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 '가학(家學)'이라고 부른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반고의 '한서(漢書)'도 혼자 저술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누이동생 등으로 이어지며 완성된 역작이다.

사관은 직무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을까. 조선조의 중종실록에 '사관은 지위가 낮지만 만세의 공론을 쥐고 있으니, 위세를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사사롭게 아부해서도 안된다. 크게는 임금의 득실과 작게는 대신의 선악을 붓으로 기록하되 늠름하고 의연해서 압설(狎褻-사이가 너무 가까워 서로 허물이 없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론은 사관의 갖춰야할 덕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사관이 어떻게 처신했는지 한 예를 들어보자. 조선조 임금중 가장 위엄 있고 신하위에 군림한 태종때의 사관 민인생(閔麟生)은 태종이 가는 곳에 반드시 따라 다닐 정도로 귀찮게 굴었던 인물이었다. 사냥하는 곳까지 따라나선 그를 보고 태종이 무엇하러 왔는가 하는 식으로 쳐다보자 당당하게 "사관으로 감히 직분을 다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사관이 군왕을 입시(立侍)하는 제도가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태종과 입시 문제로 신경전을 벌였고, 편전에서 휘장을 걷고 엿보는 등 신하의 예를 잃었다는 명분으로 귀양가는 신세에 처하고 만다.

저자는 고려시대에 궁중 규문(閨門)의 일을 기록하는 여자 사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세종도 사관 입시를 방해한 사실이나 연산군과 사관들의 갈등, 조선조때 '사초 실명제'가 거론된 일, 무오사화의 과정 등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또 인조 무인년사초 등 현존하는 사초들, 조선시대 실록 편찬 등 사관과 사초에 관한 다양한 사실들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고 임금에게 직언했던 사관 민인생의 말에서 신하가 국왕을 견제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하늘(백성)을 빌려와 민(民)을 보호하려한 조선시대 민본사상을 엿볼 수 있다.

徐琮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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